[김동열의 행복한 경제] 존경받는 부자 이야기
2016-12-07 16:30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
중국 최초의 유성영화를 찍었고, 흑백부터 칼라까지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이후 홍콩 무협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20여년간 1000여편의 영화를 찍었고, 그의 영화관은 200개에 달했으며, 하루 관객이 100만명에 달할 때도 있었다. <강산미인>, <양귀비>, <양산백과 축영태> 등의 초기 성공작은 물론 <외팔이 검객> 3부작, <13인의 무사>, <소림사> 등의 작품도 흥행에 성공했다. 쇼 브라더스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는 ‘이한상’, ‘호금전’, ‘장철’ 등이 있으며, 배우로는 장다웨이, 디룽, 왕위, 로례 등의 스타를 배출했다.
쇼 브라더스는 홍콩 동부 신제(新界), 장쥔아오(將軍澳)에 대규모 종합 촬영소를 만들어 영화 제작의 인프라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 아울러, 1971년에는 쇼 브라더스를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시키는 등 모든 분야에서 항상 앞서갔다. 그의 이름은 소일부(邵逸夫, 샤오이푸, Sir Run Run Shaw, 1907-2014)다.
그는 변화에도 능했다. 1970년에 설립된 후발 주자 ‘골든 하베스트’가 이소룡, 성룡, 홍금보, 원표 등의 스타를 배출하면서 홍콩무협영화계를 석권하고, TV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영화를 위협하자 그는 발 빠르게 방송사(TVB)를 설립하여 드라마 분야에 진출했다. 새로운 미디어의 미래를 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방송과 드라마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했다.
그는 영화와 방송 제작자로서만 유명한 게 아니다. 그는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돈을 벌어서 ‘소씨 기금’(邵氏基金)을 만들었고, 이를 활용하여 교육 분야에 주로 기부했다. 홍콩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싱가포르 등의 교육시설 확충에 기여했다. 그런 업적으로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 훈장과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중국의 록펠러나 카네기라고 부를만하다. 그가 세워서 기증한 건물이 모두 6,013개라고 한다. 예를 들어, 연변대학에도 그의 이름을 붙인 ‘일부 도서관’이 있다. 이처럼 그가 기증한 건물들을 돈으로 환산하면 30억 위안 (한화 5100억원정도)에 달한다.
그는 영화처럼 로맨틱한 사랑을 했다. 30세와 90세에 두 번 결혼했다. 싱가포르에서 사업파트너의 애인이었던, 다섯 살 연상의 여자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녀와 50년 해로했다.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10년이 지난 해, 그의 나이 90세에 그는 재혼했다. 45년간 그의 사업을 뒷바라지 해줬던 28세 연하의 여자였다. 90세와 62세의 늙은 신랑, 늙은 신부였지만 가슴만은 여전히 뜨거웠다고 한다. 그는 102세의 나이에 두 번째 부인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비로소 경영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의 인생은 드라마틱하다. 그가 만들었던 영화나 드라마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고교 졸업 후 젊은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사업에 뛰어 들었다.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부를 일궜다. 영화와 방송이라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선구자적 기질을 발휘했으며 항상 새 길을 개척했다. 사랑에 있어서도 진실하고 로맨틱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는 어렵게 번 돈을 혼자 쓰지 않았다. 대학의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해 기부를 하는 등 사회에 환원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 덧 100세를 훌쩍 넘겨 107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존경받는 부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편안한 노후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얻어지는지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