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58]오정수·나익진, 평생 목당 도와

2016-07-22 17:53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58)
제3장 재계활동 - (53) 동반자(同伴者)들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52년 1월 18일, 정부가 제출한 직선제(直選制) 개헌안이 국회에서 표결되었는데 재석 163석에서 찬성 19, 반대 113, 기권 1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부결되어 버렸다.

그전에 치러졌던 부통령 보궐선거를 통해 반여 세력의 우세함이 입증된 데다가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인 다수로 부결되고 보니, 이승만(李承晩)의 불안과 초조는 심각한 상태가 되었고 그의 추종자들은 순리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강압적인 폭력수단을 행사할 방침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관제(官製) 민의(民意)의 데모와 성토·규탄대회(聲討·糾彈大會)가 매일같이 열리고 공갈·협박과 욕설의 벽보가 곳곳에 나붙는 속에서 4월 17일, 122명의 연서(連署, 한 문서에 두 사람 이상이 잇대어 서명함)로 내각책임제 헌법 개정안이 무소속의 곽상훈(郭尙勳) 의원에 의하여 제출되었다.

이승만 박사 정관과 국회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일전(一戰)을 결단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이때 관제 데모와 공갈·협박자금을 뒷받침한 것이 소위 중석불사건(重石弗事件)이었다.

정부가 농사철을 앞두고 비료와 식량을 긴급 도입하기 위해 중석불과 정부보유불(政府保有弗)을 합하여 470만 달러를 불하했다. 그런데 정부는 보유외자(保有外資)를 6000대 1의 공정환율로 불하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시 암시세는 1만2000대 1이었은즉 달러를 팔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곱이 남는 장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달려 붙을 수는 없어서 불하를 받으려면 선이익금(先利益金)을 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중석불을 6000대 1로 사서 보통 3만대 1의 장사를 했던 것으로, 업자들의 폭리는 500억원이라는 규모에 이르렀다.

중석불사건이 정치문제화하여 국회에서 조사단이 구성된 것은 7월 18일에 가서였고, 그 바람에 뒤늦게 비료와 밀가루를 도입하게 된 업자들은 선이익금만 빼앗긴 것 뿐 아니고 된서리까지 맞아야 했다. 이 사건으로 몇몇 거상들이 업계에서 사라져 가게 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무역협회는 4월 15일, 부산 동광동 제2 군인회관(軍人會館) 2층에서 제6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김익균(金益均) 부회장 등 10여 회원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88명의 회원만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날의 총회에서 상무이사 일부에 변동이 있었을 뿐 회장 이활(李活), 부회장 오정수(吳楨洙), 전무이사 나익진(羅翼鎭)의 팀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부회장 오정수는 조선 과도정부(朝鮮 過渡政府) 상공부장으로 있다가 정부 수립 후 대일무역(對日貿易)의 정부지정 대행기관으로 설립된 대한교역(大韓交易)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제3대에 이어 제4대 부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목당(牧堂) 이활은 그와 협회를 통해 알게 된 터였는데,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잘 어울렸다.

그러나 제4대를 끝으로 두 사람은 회장직(會長職)에서 물러났다가 제8대(1960년 5월)에 가서 목당이 회장으로 복귀하자 제9대 때에 오정수는 부회장으로 재등장하여 목당이 제14대를 마지막으로 명예회장이 될 때까지 줄곧 회장·부회장 팀을 이루게 된다.

목당이 협회 활동을 통해 사귀게 되어 허심탄회하게 벗 삼은 사람이 오정수여서 협회 일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가 상담역(相談役)이 되어 주었다면 나익진은 또한 연하의 직속으로 믿을 수 있는 동반자(同伴者)였다 하겠다.

나익진은 목당과 같이 1953년 협회를 떴고, 자기 사업을 일으켜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협회 회원이사(會員理事)로 1965년 부회장이 되어서는 줄곧 목당을 도왔다. 그간 나익진은 과도정부 허정(許政) 내각에서 체신부차관과 상공부차관을 지냈는데 그를 기용한 것은 오정수였다. 오정수가 체신부장관이 되자 그를 차관으로 기용하고 상공부장관으로 전임(轉任)하면서는 또 상공부차관으로 대동하고 갈 정도였던 것이다.

목당·오정수·나익진은 무역협회를 가교(架橋)로 결속하여 이 단체를 끌고간 양식(良識)이었다. 한국에서 일개 업종단체인 무역협회가 대자본가(大資本家) 집단인 전국경제인연합회(全經聯)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단체로 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초기 무역시대에 이들이 양식으로 협회를 이끌어간 데 힘입어서였다 하겠다.

오정수는 목당이 회장으로 재임(在任)하던 1973년까지 협회 고문으로 있다가 목당이 물러서면서 같이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