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57]평생 동반자, 부인의 별세

2016-07-21 15:04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57)
제3장 재계활동 - (52) 상배(喪配)의 아픔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51년 4월 11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사령관을 해임하고 매슈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한국전의 목표는 흐려져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제한전쟁의 성격이 뚜렸해졌다.

미국의 이 같은 엉거주춤한 태도와 중공군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소련 외상 야코프 말리크(Yakov Aleksandrovich Malik)는 6월 23일 정전(停戰)을 제의하기에 이르렀고 6월 27일 참전 16개국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정전회담(停戰會談)은 개시되었다.

이 무렵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상심 끝에 가상마비(假象痲痺) 증세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문병을 갔을 때 인촌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있었으나 몸을 움직이는 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입언저리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병명이 뇌혈전증이라면 뇌혈관의 동맥경화로 혈액이 응결되어 뇌혈행(腦血行)의 일부를 정지시키는 데서 반신불수를 가져오는 난치병(難治病)이 아닌가. 이는 또 희로애락에 의하여 변화가 심한 병이어서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목당으로선 전지요양(轉地療養, 기후나 환경이 좋은 곳으로 옮겨 쉬면서 병을 치료함)으로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쪽에서는 정전회담이 시작되는가 하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국회와 대결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획책하고 있는 마당이어서 당인사(黨人士)나 측근들이 병석의 인촌을 괴롭히는 것이 목당으로선 안타까웠다.

목당도 며칠 전 아내를 대구로 전지요양차 보내고 있었다. 6·25의 견디기 힘든 곤욕을 치르고 난 아내는 부산에 내려간 뒤부터는 아예 기력을 잃고 눕게 되었으며 중풍증까지 보였다. 노환(老患)의 난치병이고 보니 치료의 효험이 없었다. 아내 역시 심신을 안정하는 것만이 약이었다.

본인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 병으로 죽으리란 생각이 든 것인지 대구에 있는 친정 아우 이원기(李源基) 집으로 가서 쉬겠다는 말을 꺼냈다. 기동을 할 수 있는 지금 친정집에 가서 한번 누워 보리라는 생각이라고 하면서.

이씨 부인은 18세에 나이 어린 13세의 목당에게 시집와서 시작된 시집살이를 75세에 이르는 나이까지 계속했다. 그것도 남편은 아들 하나를 점지해 놓고는 훌쩍 외국 유학의 길을 떠나 39세가 되어 돌아왔으며 그땐 이미 이씨 부인은 44세로 노경에 들어서고 있지 않았던가.

부부의 알뜰한 정을 나누어 보지도 못하고 젊음을 고스란히 희생한 이씨 부인이요, 4형제의 큰며느리로서의 부인의 생애는 고된 시집살이의 연속이었다. 만석꾼 집안살림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아내를 두고도 목당은 자상스러운 성격이 못 되어서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인물이요, 다만 마음속으로만 안쓰럽고 죄스럽게 생각할 뿐이었다.

아들 병린(秉麟)으로 하여금 대구로 모시게 하면서 인촌을 문병하며 새삼 생각하는 것이 인생무상(人生無常)이 아니던가.

대구로 간 아내의 상보(喪報)를 접한 것이 10월 15일이었다. 목당은 서둘러 대구로 갔다. 대구엔 다행히 넷째 아우 호(湖)가 계엄사령부 법무관(法務官)으로 있었고, 아들 병린은 영등포에 있었지만 연락이 되어 있을 것이었다.

처남 원기는 누이를 자기 집에서 세상 뜨게 한 것이 한스럽다고 목당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목당으로선 아내가 고통없이 자연사(自然死)를 했다는 것만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전시중이라고 하지만 집안간들은 모여들었고, 그런대로 조촐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장지(葬地)는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이 늘 한자리 쓸 수 있다고 말해 오던 고향 고경면(古鏡面) 조모의 산소 아래턱으로 잡았다.

목당은 조촐하나마 엄숙하게 아내의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그녀의 정절(貞節)과 희생에 보답하려 했다. 그럼에도 삼우제(三虞祭)를 지낸 다음 부산으로 피난해 있는 집에 내려오자, 목당은 집이 텅빈 것 같이 허전했다. 아들 병린은 직장을 좇아 바로 영등포로 올라가고 부친 석와 만이 남아 졸지에 두 홀아비가 지키는 것이 된 집이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만석꾼의 대가(大家)를 자랑하던 목당가(牧堂家)였지만 전쟁은 영천 이부자집을 이런 모습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목당은 서둘러 영도의 겹방살이를 청산하고자 집을 물색하러 나서서 동대신동에 초가를 한 채 사서 그 해에 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