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51]의회민주주의서 차용한 ‘이사중심제’
2016-07-20 09:5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51)
제3장 재계활동 - (46) 목당의 지도자론(指導者論)
제3장 재계활동 - (46) 목당의 지도자론(指導者論)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무역업계의 급성장에 만족했다. 특히 이사중심제(理事中心制) 운영이라는 민주주의 형태의 발전에 그는 희망을 걸었다.
목당이 런던 대학에서 택했던 경제연구과(經濟硏究科)는 당시 런던 대학이 처음 도입한 미국의 케인즈 학파(學派)의 경제학을 강의했다. 이는 자본주의 최대의 모순인 경제공황 극복의 길을 명시하여 경제학에 하나의 혁명을 가져다준 학설이다.
목당으로선 경제학 자체보다 실용성에 대해 보다 흥미를 가졌고, 그래서 경제연구과를 택했으며, 각국의 경제번영책(經濟繁榮策)에 관심을 쏟았다.
국력이란 측면에서, 그리고 의회민주주의란 측면에서 목당은 디즈레일리에 심취했다. 목당은 뒷날 무역협회 회장으로 우계(友溪) 전용순(全用淳)이나 동은(東隱) 김용완(金容完), 우당(友堂) 이중재(李重宰) 등과 허물없이 지내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디즈레일리 이야기를 거듭 거듭 들먹이곤 했다.
1837년부터 전신업무(電信業務)는 영국의 도시들과 대륙을 접근시켰다. 사람들은 지구가 영국의 창고 크기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상업중심지인 영국은 거미줄처럼 지구상에 전신망을 펴놓고 있었다. 평화의 혜택과 최강 선대, 최고 탄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부강해졌다.
이런 마당에서 영국은 의회제도를 계속시킨 것이다. 그것은 공업화와 민주화를 향해 전환해 가는 사회의 요구에 끊임없이 정책을 적응시켜 갔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사람들은 장엄, 신중, 실력의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남자들의 검은 프록코트와 하이칼라 넥타이였다.
1850년경에 영국 일반 민중은 선거권을 얼마 안 되는 부유한 중산계층에 위임하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이 중산계층은 자기들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직업적인 귀족에게 떠맡기기를 원하고 있었다. 중산계층은 굉장한 무대에서 명배우들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연출하는 장면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관객 노릇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영국의 명문 귀족은 심각한 적개심과 충돌하는 일 없이 그들의 궁정 같은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 빈부(貧富)를 막론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모든 영국 사람들은 진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영국의 정계를 이끈 것이 바로 보수당(保守黨)의 디즈레일리와 자유당(自由黨)의 글래드스톤이었다. 디즈레일리는 로마제국처럼 영국은 세계적인 위신과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하지 않았던 자당의 다수 의원들의 소망을 무시하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의 칭호를 바쳤다. 1875년에 이집트 총독으로부터 수에즈 운하의 주식 17만7000주를 400만 파운드로 비밀리에 구입했다. 주(株)의 과반수는 여전히 프랑스의 수중에 있었으나 앞으로 인도와 중국으로 통하는 최단항로가 될 수에즈는 영국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것이다. 이 해에 그는 비컨즈필드 백작에 서임되어 상원으로 들어갔다.
영국의 대제국주의(大帝國主義)는 디즈레일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중산계층의 불평분자들을 적극적인 협력자로 전환시키며 대영제국을 이룩해 놓은 기적은 의회민주주의였던 것이다.
불평분자를 적극적인 협력자로 만드는 요체가 지도자가 가져야 될 요건이란 것을 목당은 디즈레일리를 통해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