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8]대일무역 원칙 수립, 정부지정 대행기관 체제로

2016-07-19 18:18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8)
제3장 재계활동 - (43) 대한교역의 설립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그간 한국무역협회의 회원 사이에서도 대일무역(對日貿易)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으나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만은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첫째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정 때문이었고, 둘째는 몰지각한 업자들의 난립으로 혼란을 가져올 소지가 많았던데다 셋째로는 경제 재침(再侵)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1949년에 들어와서는 상공부와 재무부 및 한국무역협회 등 3자가 똑같이 대일무역에 대한 실행방안을 내놓기에 이르렀는데 한국무역협회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원칙(原則)
과거 장시간에 걸쳐 한국 산업·경제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은 한국의 재원·생산시설, 기타 제반 사정에 한국인 이상으로 정통하고 있는 데 더하여 일본은 지리적으로 거리가 근접하고 언어가 자유로우며 여러 가지 연고 관계가 복잡한 까닭에 타지역과 동일한 시책하에 방임한다면 무자각한 업자가 난립 발호하여 수습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고 일본 자본이 단시일 내에 용이하게 전산업경제계에 침투하여 전경제계는 물론 심지어 경제 재침략의 기반을 조성할 것인 바 이는 일본에 비하여 제반 조건이 한국업자에게 비교적 유리하였다고 할 수 있는 마카오항(港) 무역이 일본에 전단(專斷)된 사실에 비추어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정에 비추어 제반 시책에 있어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으며 대일무역은 정부무역에 준하여 엄격한 통제적 시책하에 계획적으로 수행함이 필요함.

2. 대책(對策)
가. 무역 형태
위체(爲替)가 성립될 때까지 물물교환식 무역이 부득이할 것이며 세계시장의 물가 및 정책적 견지에서 그 교환율을 정부에서 통제 내지 2중교환율(交換率)을 실시할 것.

나. 무역의 내용
첫째, 수입물자는 생산기계, 동 부속품, 공업원료, 기타 생산물자에 국한하되 국내 공업 육성에 지장이 안 되도록 유의할 것.

둘째, 수출물자는 공업진흥상 지장이 안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물자를 수출할 것. 이상의 수출입품 조정을 위하여 엄밀한 조사와 구상하에 수입품목 및 수량의 리스트를 작성할 것.

3. 실행 방법
가, 수입·수출은 정부의 허가를 득할 것.
나, 대일무역 영업허가제도(營業許可制度)를 실시하되 그 자격 심사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업계의 실정에 밝은 한국무역협회로 하여금 신청자의 적격 여부를 먼저 조사, 추천케 할 것.
다, 영업면허업자(營業免許業者)로 하여금 신청자의 적격 여부를 먼저 조사, 추천케 할 것.

4. 수출입조합(輸出入組合) 운영방침(運營方針)
가, 정부무역(政府貿易) 이외의 대일본 수출·수입은 정부의 지도 감독하에 전적으로 본 조합에서 행하되 조합원의 자유기업성(自由企業性)을 활용하는 견지에서 실시행위(實施行爲)는 조합원에게 위탁할 수 있음.
나, 정부의 명령에 의하여 정부무역을 대행할 수 있음.
다, 수출물자는 생산지도 및 품질검사를 행함.
라, 금융을 알선함.
마, 유보금(留保金)제도로 수입물자를 조정함.
바, 국가 무역 계획에 관한 자료를 제공하며 또한 자문에 의한 답신(答申)을 행함.

5. 기타사항(其他事項)
가, 물물교환율의 표시 내지 수출·수입물자의 종목을 결정하여 대일무역 일반에 관한 자문기관으로서 관계 권위자를 총망라하여 위원회를 설치할 것.
나, 일본 업자의 국내 여행을 제한하며 장기간 체류를 금함.
다, 수출입물자는 원칙적으로 한국 선박을 이용할 것.

무협은 이렇게 조심성 있는 태도를 보였다. 즉 대일수출입조합을 통한 무역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재무부는 원칙적으로 물물교환제를 주장하고 교환율은 두 나라의 화폐구매력(貨幣購買力) 비율을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었고 상공부는 정부 대행 무역공사(貿易公社) 설치를 들고 나왔다.

결국은 수입은 업자가 소유한 미 달러로 현수입품목에 지정된 범위 안에서 수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대일무역의 정부 지정 대행기관으로 대한교역주식회사(大韓交易株式會社)의 설립을 본 것이 1949년 8월 1일이었다.

대한교역은 처음엔 상공부 무역국 내에서 사무를 개시했다가 미도파에 사무소를 정하게 되자 박충훈(朴忠勳) 무역국장의 배려로 200여 평을 할애받아 한국무역협회는 처음으로 독립된 사무소를 갖게 되었다.

6·25 남침에 이은 환도 후에 협회가 미도파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연고에서였고 이것이 오늘의 무역회관 건립의 기초가 되었다.

대한교역의 설립으로 대일무역의 통로가 마련될 즈음 또 하나의 획기적인 무역발전을 가져온 조처가 있었다. 1948년 12월 12일에 체결된 한·미 사이의 원조협정(援助協定)의 발효가 그것이었다. 1월부터 미국의 대한 원조가 GARIOA의 이월액(移越額)과 더불어 ECA로 이관되었다. 원조의 성격도 종래의 소극적인 구호 원조에서 자립경제를 돕는 재건원조(再建援助)로 전환한 것이다. 업계는 ECA 원조자금 가운데서 석탄과 철도용품, 방직기계 부속품과 전차 및 자동차와 전신·전화용품 등 15종목의 주요 물자를 민간무역으로 취급하게 되었고 8000만 달러 상당의 대일 무역이 약속되어 자주성 있는 무역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대일통상(對日通商)으로 비로소 한국무역은 국제무역의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ECA 원조자금(援助資金)에 의한 무역에 있어서 당초에는 민간무역을 불허한다는 것이었으나, 협회의 노력으로 그것도 참여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대일무역이 활발해진 것은 1950년에 들어가면서였는데 이로 하여 수산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대한교역은 수출만을 대행하고 수입은 해당 업자에 맡기고 있었으므로 업자들은 우선은 대한교역을 통해 대일무역에 진출했다.

초기 무역기 수출 대상품은 앞서 말한대로 오징어가 유일한 품목이었는데 특정 상품으로 인기를 끈 것 가운데 나전칠기와 한천(寒天)이 있었다.

홍콩 무역에서 가장 인기상품이었던 한천은 1948년만 해도 현지에 15만여 근이 미처분(未處分)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오징어 다음가는 상품이었다.

화신(和信)의 무역선 앵도환(櫻桃丸)도 20만 근의 한천을 싣고 나갔었다고 했는데, 초기 무역의 신화를 낳게 한 것이 바로 한천이었던 것이다. 일제하에서는 한천 제조는 일본인들이 독점해왔으며 제조법도 극비로 숨겨져 왔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이 되자 대한원양어업(大韓遠洋漁業) 사장이던 최서일(崔瑞日)의 권고로 제조업에 손을 댄 사람들이 태반이었는데, 이들이 중앙 수산시험장의 지원을 받아 어깨 너머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제조에 착수하여 1946년 겨울 첫 제품을 냈다.

이렇게 일부 업자들이 제조에 성공하자 다음해에는 가마(釜) 수가 부쩍 늘었음은 물론이다. 1946년의 제조부수(製造釜數)는 98개에 달했는데, 그중 경남이 55, 경북 22, 전남 21로 모두 92부(釜)가 가동을 보았으며 해방이 가져다 준 벼락부자들이 있었다면 이들은 바로 한천업자들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은 1947년 한국한천제조조합(韓國寒天製造組合)을 결성했는데 돈의 위력으로 호기가 대단했다. 조합본부를 서울에 두고 포항과 부산·목포에 출장소를 설치하여 조합원의 운영자금 융자와 원초 구립, 물자 공동 구입에다 생산 및 제품의 판매·통제 업무 등을 담당했다. 조합원은 삼양사(三養社) 등 22개 사였는데 생산 실적을 보면, 1947년을 피크로 하면서 1946년에 1만2100근, 1947년에는 35만9300근, 1948년에 35만5000근, 1949년에는 43만2166근의 실적을 나타내고 있다.

1947년 매출액을 근당(斤當) 25달러로 계산해도 900만 달러에 달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당시 실질 환율이 150대 1이었으니 14억5000만원이 22개 업자의 주머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특기할 일은 이들 업자들 가운데 실업가로 성공한 사람은 몇 사람 안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