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6]김구 암살·미군 철수, 불운의 연속

2016-07-19 09:5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6)
제3장 재계활동 - (41) 위기의식(危機意識) 감도는 정국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49년 4월의 제3회 정기총회는 목당(牧堂) 이활(李活)을 다시 3대 회장으로 선임하였으며, 부회장인 김익균(金益均)과 박병교(朴炳敎)도 유임시켰으며 다만 상무이사 4명을 더 늘렸는데 신임으로 김재원(金在元)·이광화(李光華)와 김창화(金昌華)·정규성(丁奎成)이 선임되었다.

무역협회는 회장단의 유임으로 순탄한 운영이 약속되었다. 한편 행정부 쪽은 정부 수립 후 상공부의 상역국장(商易局長)에 박충훈(朴忠勳)이 취임하였고 재무부장관에는 앞서 말한 대로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 차관엔 장희창(張熙昌)이 취임함으로써 협회에 관한 상의를 격의 없이 할 수 있었다.

나익진(羅翼鎭) 전무는 각 은행의 브레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론파(理論派) 동지들을 규합하여 경제연구회(經濟硏究會)를 조직하여 자기 연마에 힘쓰는 한편 상역국장 박충훈과 의기투합하여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질 정도가 됨으로써 회원상사들의 여론을 반영시키는 데 빈틈이 없었다. 협회 탄생은 얼마 안 됐지만 이미 기틀이 잡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대한민국의 심상치 않은 국내외 정세에 대해서는 목당은 지난날의 오랜 버릇대로 신문을 정독하는 정도였다. 다만 한 줄 놓치지 않고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비록 정계와는 멀어졌다 해도 정국에 대한 관심만은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1949년 1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하야하고 총통 대리가 된 부총통 리쭝런(李宗仁)은 화평(和平)을 간청하였으나, 중공에 농락만 당하고 대륙은 급전직하로 적화되어 갔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대륙에서 일어난 급격한 정세 변동은 곧 대한민국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 적색분자들이 때를 만난 듯 설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편승하듯 국회 부의장 김약수(金若水와)와 무소속의 이문원(李文源) 등 65명의 의원은 연서(連署, 한 문서에 두 사람 이상이 잇대어 서명함)로 유엔 한위(韓委)에 외군철퇴(外軍撤退)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나섰다. 미군의 철수는 유엔 총회에서 의결된 국제적인 약속이었고 정부도 민족진영에서도 외국군이 무한정 주둔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만주가 이미 적화된 데다가 소련군의 철수라는 것은 고작 두만강을 건너는데 지나지 않는 데 비해 미군의 철수는 태평양을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정부는 미국이 군대를 철수하기에 앞서 남한을 무장시키고 유사시에는 대한민국을 방위한다는 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당에 당장 미군이 철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대한민국을 공산당에 넘겨주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런 주장에 의원(議員)이 가담했다면 이들은 위험한 기회주의자들인 것이다.

협회의 제3회 정기총회를 준비하고 있던 4월 초에는 중공군이 양쯔강 이남을 모두 장악하였고 24일엔 이미 난징(南京)에 진입하였다. 대륙에서 이렇게 사태가 급변하고 있는 마당에 4월 18일 미국무성 대변인은 주한미군을 수개월 내에 철수한다고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북한은 해방 당초부터 소련의 무기 제공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탱크와 비행기까지 갖춘 수십만의 현대식 군대를 갖추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고작 미제 소총에다 심지어 일본이 버리고 간 구식 소총까지도 쓰고 있는 빈약한 군대 몇 만 명이 있을 뿐이었고 징병제(徵兵制)조차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정황 속에 남한 자체 내에서, 더구나 국회 안에서 미군 철수를 외친다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세가 이렇게 되니 이제까지 공론(空論)으로밖에 보이지 않던 남북협상론(南北協商論)도 현실감을 띠게 되고, 위기의식은 날로 고조되어 갔다.

이른바 소장파(小壯派)라는 사람들의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뒤에는 공산당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목당도 짐작했는데, 뒤에 경찰이 밝힌 것을 보면 남로당(南勞黨) 지령에 의한 것으로 드러나 그의 짐작은 들어맞은 것이었다. 이런 북새통 속에 6월 26일 김구(金九)가 현역장교에게 암살당하였다. 6월 29일에는 미군이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남한에서 철수를 완료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국부(國府, 중국 국민당이 1925년 광저우에 수립한 중화민국 정부인 ‘국민 정부’을 줄여 이르는 말)의 전철을 밟을 위험성이 너무나 컸다.

목당은 사태가 이렇게 기울여져 가는 것을 볼수록 민족진영의 갈등이 한심스러웠다. 이런 판국에 정부와 국회가 개헌 문제를 놓고 정면대결의 파국으로 치달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