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3]김용주, 건국 초기 해운업 키우다

2016-07-18 11:5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3)
제3장 재계활동 - (38) 외항로 개척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북한에 의한 앵도환(櫻桃丸)의 압류는 남·북한의 단절을 뜻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앵도환은 최초의 대외 무역선으로 자랑스럽게 취항하다가 부산으로 돌아와 닻을 내렸다. 그런지 며칠 안 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경축일을 그들은 또한 맞았다. 홍콩 빅토리아 부두에 입할할 때만 해도 홍콩 정청(政廳)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입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들고 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치욕을 겪지 않고 당당하게 태극기를 게양하고 세계를 누빌 수 있게 되었다. 선원들의 가슴은 부풀었다.

앵도환은 일본 미쓰비시상사(三菱商社) 한국지점에 소속된 화물선으로 2200t급인데, 당초에는 조선우선(朝鮮郵船)의 소속이었다가 해운공사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간 수리를 해서 운항이 가능하게끔한 것은 조선우선 사장 김용주(金龍周)의 공로였다. 그는 해방 후 우리나라가 해운업을 시작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그는 포항에서 폭넓은 사업을 했던 청년실업가로 조선우선의 대주주로 있었던 연고로 해방 후 해운 건설에 뜻을 두고 조선우선을 맡아 운영하게 된 사람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그는 우수한 해기원(海技員)을 규합하여 조선해운건설연맹(朝鮮海運建設聯盟)을 조직, 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9월에 미군이 진주했을 무렵에는 서울의 연료 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석탄을 인천으로 실어오라는 진주군의 명령을 받자 그들은 선박의 수리에 나섰다. 그런데 조선우선 선박은 남방(南方) 전장에 징용돼갔고 오직 1척이 인천에 수리를 위해 정박하고 있었다. 이 배를 수리해 선원을 배치하고 제1선으로 삼척에서 석탄을 실어왔다. 그러나 그 배를 가지고는 도저히 석탄 갈증을 풀 수 없었다.

별다른 길이 없어 해촌(海村) 김용주는 미군에서 전시용 선박 10척을 빌어 석탄을 실어와 이 해 겨울을 넘기게 했다. 해촌은 해운업(海運業)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기로 하고 재산을 정리하여 250여 만원을 조선우선에 투입했지만 해운업은 개인사업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허정(許政) 교통부장관을 설득, 반관반민의 대한해운공사를 1948년 말에 설립하게 되었다. 조선우선은 이에 흡수되어 모든 재산과 선박을 해공(海公)에 넘기고 해촌이 사장이 되었다. 이때가 해외 무역을 막 시작할 무렵이다.

해외 무역을 하려면 국적선(國籍船)을 사용해야 하나 홍콩까지도 정기 항로가 개설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역협회(貿易協會)에는 시험수출을 위한 공동 수출 문제가 제의되어 해촌에게 국적선을 띄우는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다. 국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우리는 마카오선, 홍콩선을 제한 없이 받아들이고 있은즉 안 될 일도 아니었다. 이리하여 해촌이 홍콩에 나가 해사부장(海司部長)과 접촉 끝에 비공식적으로 출입할 수 있는 협정을 맺었다.

이리하여 1949년 1월 홍콩으로 조선우선이 홍콩 정기항로를 개설하고 3000t급의 금천호(金泉號)를 띄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초기 무역 개척에 있어서 조선우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좀더 이 배 이야기를 해두어야 될 것 같다.

해방 당시의 이남의 선박 보유량은 조선우선 소속의 대형 선박 6척 8만여t과 20t 이상의 민간선박 15만t 해서 도합 23만t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그마저 노후선(老朽船)이 대부분이어서 해촌이 수리해서 띄울 수 있던 배는 앵도환과 금천호 두 척뿐이었던 것이다.

폭주하는 건설자재와 인원을 수송함에 미치지 못해 해상 운송난(運送難)은 극심했다.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군정은 미국의 대한 원조계획 2500만달러 가운에서 LST형 등 40척을 1948년 4월까지 도입해서 운수부(運輸部)로 하여금 직접 운영토록 했다.

원양선(遠洋船)은 해촌의 조선우선이 확보한 데 반하여, 연안선(沿岸船)을 관리하고자 한 근해상선(近海商船)은 발족은 하였으나 선박확보가 안 되어 별로 실적을 나타내지 못했다. 뒷날 1950년 10월 대미 취항(對美 就航)을 한 고려호(高麗號)는 부산항에 침몰되어 있던 기선을 남궁련(南宮鍊)이 인양하여 극동해운(極東海運)을 설립하고 띄운 것이다.

불모지에서 해운업을 일으키는 데 해촌은 안간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런 터에 1949년 조선우선은 앵도환을 잃었으니 여간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