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1]정부 수립, 무역 통해 민족자본 축적 총력
2016-07-15 09:3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1)
제3장 재계활동 - (36)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제3장 재계활동 - (36)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48년 8월 15일, 제3회를 맞는 해방기념일을 기하여 정부 수립이 선포됨으로써 명실공히 우리 정부가 성립되니 이로써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을 상실한지 장장 38년 만에 이 땅에 민주주의(民主主義) 정부(政府)가 선 것이다.
이 해의 목당(牧堂) 이활(李活)의 나이는 50세였다.
원열기(圓熱期)에 들어선 나이로 5월 19일 입법의원(立法議院)이 해산되면서 다음날인 30일 무역협회 임시총회에서 2대 회장에 선출된 목당·····.
단일정당으로서는 한민당이 단연 제1당이었으나 29석이란 숫자는 그동안의 반탁투쟁과 정부수립을 위해 싸운 공헌에 비하면 적은 숫자였다. 하긴 무소속이나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 혹은 대동청년단이나 민족청년단의 이름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당원까지 합하면 84명에 달하였고, 그 밖에도 노선을 같이할 당선자까지 합치면 100명 이상으로, 한민당은 국회 세력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한편 표면으로는 5·10 선거를 보이코트한 한독당은 당선된 무소속 가운데 30명 가까이가 한독당에 동조하는 중간파여서, 5·10 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制憲國會)는 한민당과 한독당계 중심의 반한민당 세력, 그리고 독촉(獨促)을 중심으로 하는 이승만 직속세력 등 3대 세력이 정립하는 모습으로 개원을 맞고 있었다. 1948년 5월 31일 중앙청 홀에 임시로 마련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된 개원식(開院式)이 바로 그것이었다.
초안(草案)의 권력구조가 하룻밤 사이에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승만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를 이화장(梨花莊)으로 부른 일이 있다.
“나는 이름만의 대통령을 할 생각이 없소. 미스터 김이 좀 수고해 주셔야 하겠어.”
“선생님께서 대통령하시는 동안에 그렇게 해도 좋겠습니다마나는 헌법을 그렇게 그때 그때 고칠 수야 있겠습니까?”
“한민당이 꼭 그렇게 하겠다면 다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요.”
이승만은 노기 띤 얼굴로 언성을 높여 소리치고는 다른 방으로 가버리지 않았던가.
집으로 돌아온 인촌은 곧 당간부와 당법기초위원(黨法起草委員) 거의 전원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모인 사람들은 이승만의 위협 공갈에 흥분하여 내각책임제를 그대로 상정하여 표결에 붙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촌은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의 위협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그는 능히 그렇게 할 위인이라는 것을.
인촌은 결심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지 않으면 독립이 늦어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더한 혼란이 올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유엔(UN) 감시 하에 선거를 치른 터에 또 혼란이 온다는 것은 당시의 내외 정세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사정이 아니던가.
인촌이 양보하기로 한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의 길은 열리고 한국민주당은 야당(野黨)의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목당은 국회 제1당의 당수(黨首)로서 인촌이 겪는 고초를 다만 멀리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고, 그런 가운데 7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나와 남북통일의 염원을 표시한다는 명분 아래 국무총리에 한조민주당 부위원장 이기영(李允榮)을 지명하였다. 목당은 신문을 통해 인촌이 지명되지 않은 이승만의 설명을 읽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 조직과 국무총리의 인선으로 추천한 명록(名錄)이 여러 가지로 들어왔습니다. 그 모든 추천 명목으로 보든지 신문과 여론상에 발표되는 것을 보건데, 그중에서 가장 국무총리 책임으로 중망을 가지신 분이 세 분인데, 김성수,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등입니다.(중략) 그러나 민의(民意)와 또는 내정(內定)의 관계를 아니 볼 수 없는 형편이므로 3씨는 국무총리 명의로 임명하지 않기로 한 것이 내 마음에도 섭섭하며 여러분의 천거를 시행치 못하게 된 것이 대단히 미안하나 내가 그 이유를 대개 설명하려 합니다.(중략) 김성수 씨로 말하면 누구나 정당을 주장하는 인도자로만 지목할 수 없는 것이요, 그분의 인격과 애국심과 공평 정직한 것은 어떤 정당이나 단체 사람을 물론하고 추앙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줄로 나는 믿으며, 또 따라서 나의 사분상(私分上, 개인끼리의 사사로운 정)으로는 몇 십 년 전부터 알아서 절대 믿고 애중히 여기는 터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생각이 국무총리보담 덜 중대하지 않은 책임을 김성수 씨에게 맡기려는 것이 나의 가장 원하는 바이므로 다음에 발표될 때 보시면 알려니와, 이러한 각오에서 김성수 씨는 그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중략)’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승만의 설명을 읽으며 목당은 속으로 울고 있을 인촌을 생각했다.
목당은 이승만이 환국했을 때 영천(永川)까지 내려가 대대적인 환영회를 개최하고 그를 치하한 바 있었다. 그것이 이승만과의 첫 대면이었는데 당시로서는 평생을 조국 광복에 바쳐온 노투사(老鬪士)의 체취를 맡으며 감복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그가 권모술수를 일삼는 데는 혐오감마저 일었다.
목당은 인촌이 이끄는 한민당 세력의 배제를 목표로 삼고 있는 그가 인촌을 역이용하면서까지 권력집중(勸力集中)을 꾀하는 노회성(老獪性, 경험이 많고 교활함)에 혀를 찼다. 그런 면에서는 인촌은 결코 이승만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새삼 생각하는 목당이었다.
무협(貿協)에서는 무역선(貿易船)에 실려온 수입물자를 처리하기 위한 가격사정위원회(價格査定委員會)가 매일같이 열리는 외에도 공동수출 사업으로 분주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공동 수출 사업에 참여한 계명무역(鷄鳴貿易)은 7000여 만원어치 물자를 위탁해왔고 사장 이상도(李相度)가 현지로 쫓아가는가 하면 건설실업(建設實業) 또한 김익균(金益均) 사장이 전 무를 대동하고 현지에 나갈 정도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협회는 자비 부담으로 현지 여행을 희망하는 위탁자에 대한 여행 수속까지 밟아주어야 했고, 수출 금융도 알선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느라 사무직원들은 정신없이 뛰어야 했다. 제 나라 제 정치를 처음 해보는 정계(政界)는 독선적인 지도자로 해서 처음부터 풍파를 겪고 있었지만, 무역업계(貿易業界)만은 스스로의 실력배양에 전념하여 이렇게 자주무역(自主貿易)의 기틀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목당은 그런 가운데도 언젠가 인촌이 한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장돌뱅이나 모아 놓고 고작 한다는 게 돈벌어 자동차 타자는 거요?”
그렇다. 자본이 영세한 우리 업자들은 장돌뱅이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돈을 더욱 열심히 벌어야 한다. 민족자본이 축적됨으로써만 자주독립(自主獨立)은 기반을 굳힐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공동 수출 사업은 확실히 한국 무역사의 한 장을 연 계기임에 틀림없었고, 그것은 목당이 회장으로 있는 무역협회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목당은 런던에서 인촌과 설산을 상대로 한국에 장래가 있기 위해선 놓여 있는 처지를 감수하면서도 자주경제(自主經濟)의 저력을 길러야 된다고 역설했었다. 인촌이 한국의 얼이 담긴 대학을 육성해야겠다고 말한 데 대해서도 목당은
“교육사업은 더욱 간섭과 탄압이 심할 터인데·····.”
하고 내다보면서 자강(自彊)을 위해선 먼저 경제 실력을 길러야 된다고 했다.
지금 목당은 인촌과 가는 길은 다르다. 인촌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현 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대학을 만들었고 국회 제1당의 당수로 정치 일선에서 자주·자립국가 건설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자주·자립의 국가를 뒷받침하는 것은 다름아닌 민족자본인 것이다. 목당은 나라 사정이 어수선할수록 더욱 긍지를 갖고 무역협회 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