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35]아이비스 호 부산 입항···홍콩 무역 등장

2016-07-12 09:2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35)
제2장 재계활동 - (30) 기틀 잡는 업계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업계는 마카오와 홍콩을 근거지로 한 무역을 통해 기틀을 잡아 갔다.

1947년 8월 27일, 아이비스 호라는 홍콩 무역선(貿易船) 한 척이 부산항에 처음으로 입항했다. 그러나 영국은 우리나라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 아닌 상황이어서 뒤늦게 마카오 정청(政廳, 정무를 행하는 관청)을 통해 홍콩 상품이 한국으로 수출되는 것을 알게 된 홍콩 정청은 1947년 8월부터서야 대한(對韓) 수출 허가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마카오 무역은 6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대신 홍콩 무역이 등장한 것이다.

그 후에도 홍콩 무역을 마카오 무역이라고 부르기도 했거니와, 사실 어느 정청이 허가한 것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 실질적인 내용은 같고 보면 혼동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홍콩 정청에서 수출 허가서를 받은 첫 배가 아이비스 호 였으며 그 배는 직항로(直航路)로 가장 단거리인 부산항에 입항한 것이다.

부산항은 이렇게 하여 해방 후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이비스 호를 주선해 들어온 것은 열신공사(悅新公司)의 신석호(辛夕虎)라는 젊은 실업가였다. 이 배가 싣고 들여온 상품은 성냥과 인쇄기, 원면과 염료·소금·생고무·신문용지·옷감 등속에다 보온병을 비롯한 잡화들로서 종전의 마카오 무역선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측에서도 화신무역(和信貿易), 중앙교역(中央交易), 계명무역(鷄鳴貿易) 등의 많은 무역상들이 그들과 거래를 했다. 교환된 상품은 연(鉛, 납), 아연광석(亞鉛鑛石)과 오징어 해삼 등 광산물(鑛産物)과 해산물이었다.

홍콩 무역은 이듬해 봄인 1948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져 갔고 이즈음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거상들이 직접 무역선을 끌고 나갈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무역선을 기다려 그들의 물건을 팔아주고 대상 수출품을 사주는 거간무역에서 벗어나 자주적 직수출무역이 시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무역 거래방식도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특기할 것은 환금은행(換金銀行)의 설립을 본 사실이다.

조선환급은행(朝鮮換金銀行)은 1947년 7월 15일 발족하여 1950년 6월 조선은행(朝鮮銀行, 현 한국은행)에 흡수될 때까지 만 3년 동안의 수명이었으나, 업자들의 자주무역의 문호를 터준 금융기관이었다. 즉, 이 은행도 처음엔 바터제(制) 무역(특정 상품의 상호교환을 통해 수출입거래를 하는 무역)이고 보니 무역업무라는 게 있을 리 없었고, 주한 미군 관계의 외환 결재가 업무의 전부로서 개점휴업 상태였으나 차츰 신탁선적제(信託船積制)와 무역금융제(貿易金融制)의 실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이리하여 1948년에 들어가 국내 업자들의 활발한 해외진출을 약속해 주기에 이르렀다.

최초의 무역선을 띄운 것은 화신무역(和信貿易)이었으며 곧이어 동아상사(東亞商事)도 배를 띄워 보냈다. 화신무역이 조선우선사(朝鮮郵船會社)의 앵도환(櫻島丸)을 전세내어 홍콩으로 띄운 것은 1948년 2월의 일이다.

이에 앞서 여기서 남북무역(南北貿易)에 관해 잠깐 언급해 두어야 하겠다. 남북무역은 정부가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무역협회로서는 관여할 바 아니었고 특정인에 의한 모험무역(冒險貿易)이었으므로 회원상사들에게도 딴 세상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