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25]반탁 방법놓고 이견 냈던 송진우 피살

2016-07-05 17:10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25)
제2장 재계활동 - (20) 정계의 난기류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정계가 자기 무대가 아님을 자각한 나머지 적극적인 의욕을 보이지 않았지만 자의든 아니든 그도 정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는 인척관계에 있었으므로 한국민주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인촌에다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와의 친분으로 해서 그는 그런 입장에 놓이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민주당의 주역들 대부분이 개인적인 연고를 가진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백봉(白峰) 라용균(羅容均) 사무국장(事務局長은)은 와세다 대학 선배이자 런던 대학 정치경제학과 선배도 되었고,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 총무 김양수(金良洙) 등도 구미 유학 동창들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그가 속해 있는 사교층의 사람들이 모두 정치가였던 것이다.

그런 터에 12월 30일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宋鎭禹)가 피살되는 돌발사건이 발생했다. 목당에겐 참으로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2월 28일 한국을 신탁통치하에 두기로 했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놀라운 결정이 보도된 바로 이틀 뒤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신탁통치가 몰고온 민족적 저항은 거셌다. 바야흐로 3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을 반대, 분쇄하는 일이 거국적인 과업으로 등장한 것이다. 28일 밤,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거처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정(臨政) 국무위원 전원과 좌우를 망라한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일대 국민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이어 29일에는 신탁 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임정 측에서는 미군정으로부터 즉각 정권을 인수해야 한다는 초강경론도 나왔다. 고하는 이와 같은 비현실적이며 실현 불가능한 공론에 반대하면서 국민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미국의 여론에 호소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탁(反託)에는 이론이 없었으나 그 방법에는 의견 차이가 많았다.

아무튼 28일 밤, 비상대책회의는 밤 8시에 개최되어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고 이 자리에서 격론이 벌어져 즉각 정권 인수를 주장하는 임정측은 합리적인 방법을 내세우는 고하에게 고압적으로 나왔다. 임정측은 심지어 고하를 찬탁파로 몰아부치기도 했으나 그는 결코 이에 굴하지 않았고 새벽 4시에 산회할 때까지 회의는 결론을 얻지 못한 채 흩어졌다.

국민총동원위원회의 위원이 발표된 것은 30일이었는데 고하는 이 발표를 보지 못하고 그날 새벽 6시 15분 흉한의 총탄에 맞아 향년 56세로 파란 많은 생애를 중단당하고 만 것이다.

목당이 고하의 비보를 받고 원서동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인촌 등 많은 인사들이 먼저 와서 비통에 잠겨있었다. 13발을 쏜 중에서 6발이 명중하였다는 것인데 시신은 유혈낭자하였으나 얼굴만은 석고처럼 깨끗했다. 집으로 돌아온 목당은 아버지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고하면서, “정치를 해본 일이 없는 사회에서 정치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라고 덧붙였고 석와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