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8]일제 수탈로 피폐해진 농촌 현실에 개탄

2016-06-27 10:0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8)
제1장 성장과정 - (13) 만감의 금의환향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36년 5월 늦봄,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일제의 착취와 압박 아래 신음하고 허덕이는 땅, 그러나 꿈에도 잊지 못하던 고향의 땅을 다시 밟게 된다.

영천역에 내리자 역두에는 뜻밖에도 그의 부친이 동생 담(潭)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목당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런던을 향해 떠나던 10년 전 경성역에서의 부친은, 그래도 젊음이 가시지 않은 한창의 장년이었는데, 어느새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 않은가.

“아버님, 저 돌아왔습니다.”

“잘 왔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이 짧은 부자간의 인사 속에는 그동안 쌓인 온갖 사연과 한없는 정이 그대로 응축된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더 이상의 긴 말을 잊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깊은 학문롸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은 그저 기쁨이었다. 함께 따라온 담(潭)도 너무나 어른스러워 보였고 손자 병인(秉麟) 역시도 그랬다.

영천에서 택시를 내어서 고향집 송호정(松湖亭)에 다다르니 넓은 집은 일가 친척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모친은 목당을 붙잡고 다만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누구보다도 가장 애타게 기다리던 목당의 부인 이(李)씨는 그러나 어른들 앞에 나서지 못하여 뒤켠에 숨듯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아내가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조선옷을 입으며 목당은 새삼스레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실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10년이나 서양 유학을 하고 돌아왔으므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으리라고 생각한 것인지, 그가 마치 방금 옆 마을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는 것을 보자 모두 적이 놀라는 듯했다. 간혹 일본만 잠시 다녀와도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서 일본인 흉내를 내려고 드는 축이 있어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근본이 뚜렷한 사람은 역시 다르다는 말로 그를 칭찬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송호정 집은 담장을 두른 바깥채 둘과 중문을 통해 들어가는 안채 둘로 구성되어 있는데 바깥채 가운데 한 채를 목당이 쓰기로 하였다. 목당은 부친한테 서고(書庫)를 지어야겠다는 뜻을 말했다.

마침 부친 석와도 추사(秋史, 김정호의 아호)의 글씨를 비롯하여 상당량의 귀중한 서화(書畵)들을 수집하고 있어 서고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이었으므로 그의 뜻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목당은 서고가 지어지면 곧 도착할, 영국에서 부친 책들을 간수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의 책뭉치 속에는 일본에서는 구할 수 없는 정치·경제관계 저서 뿐 아니라 문학·철학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가 다 망라되어 있었다.

목당은 고향에서 쉬고 있으면서도 국내의 제반사정을 살피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일본 경찰은 그를 요시찰 대상으로 규정하여 그의 모든 동정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라 사정도 극도로 피폐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전날보다도 더욱 영락되어가고 있었고, 남부여대(男負女戴, 남자는 등에, 여자는 머리에 짐을 인다는 뜻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을 일컫음)하여 혹은 다른 지방으로, 혹은 만주땅으로 가기 위해 정든 고향을 등지는 이농가(離農家)들이 속출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1935년 2월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5단보 이하의 적은 땅을 갖고 있거나 땅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영세농민이 경상·전라도에만도 62만6600호가 넘는, 그런 비참한 실정이 당시 조선의 모습이었다. 조선 전역에 100여 만 호의 영세농가가 있는 중에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만 그 숫자가 날로 증가하여 전체 영세농의 6할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비하면 8배가 넘는 숫자에 해당하였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우리 농민들이 더 고통을 받게 된 이유는 이 지역이 주로 미곡집산지라는데서 이곳 농민들을 이북이나 만주 방면으로 내몰고 그 땅을 일제(日帝)가 차지하려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의 간계(杆計)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이미 1933년 만주로 만주이민단(滿洲移民團)을 보냈으며 그곳으로 쫓겨나는 이민은 날로 증가하였다. 이는 과잉 노동인구를 흡수할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지 못한 데도 또한 이유가 있었고 토착민의 본토로부터의 추방정책 탓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루는 부친 석와가 목당을 데리고 대구로 나들이를 나섰다. 거래은행인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령에 의해 설립된 특수은행. KDB산업은행의 전신) 대구지점에 볼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두루마기 차림의 부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정도였다.

석와는 식산은행 대구지점과 거래를 해왔는데 그가 굳이 아들 목당을 대동하고 나타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어쨌든 이들 부자가 용건을 마치고 은행 문턱을 나서는 뒤를 일본인 지배인은 문밖까지 쫓아나오면서 굽신굽신 석와 부자의 뒤에다 몇 번이나 절을 했다.

일제는 조선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토호(土豪, 지방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는 호족)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감시는 할지언정 그들의 비위를 거스리지는 않는 회유책을 취하고 있어서, 그 점을 아는 석와는 굳이 아들 목당을 데리고 간 것이고 목당에 대한 감시도 감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그의 처신에 일일이 간섭한다던가 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