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23]광복의 감격, 조국을 위한 일을 찾다
2016-06-30 18:38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23)
제2장 재계활동 (1) - (18) 8·15 광복과 상경
제2장 재계활동 (1) - (18) 8·15 광복과 상경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8·15 민족 해방을 맞은 것은 영천 고향집에서였다.
목당은 일본의 항복이 멀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의 지시로 서울의 동생 가족들이 모두 고향으로 소개해 와서 그의 시골집은 떠들썩했다.
어느 날인가 목당이 인촌(仁村) 김성수댁(金性洙宅)에 들른 일이 있었다. 그때 인촌이 낡은 편지 한통을 그에게 꺼내 보였다.
그렇다고 했다. 그때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목당에게 내보이며 빙그레 웃는 것이 아닌가.
인촌이 영국을 다녀간 뒤 목당은 인촌에게 영문으로 된 편지 한 통을 띄웠다. 내용인즉 유럽 쪽 전세를 알리고, 멀지 않아 일본이 만주에서 불장난을 저지를 것이며, 태평양이 전쟁의 도가니로 빠져들 것이 틀림없을 거라는 견해를 적었던 것이다.
당시 목당이 그런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영국에서 인촌을 밤낮으로 대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중국인이 경영하는 단골집 쉰동(順東)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서로 간에 못하는 말이 없었는데 하루는 목당이,
“세계대전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거요. 히틀러의 광기, 일본 군벌(軍閥)의 오만을 보시오.” 하고 단언하듯이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인촌과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는 어떻다 자기 견해를 밝히지 않는 것이었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그들이 그런 태도를 보였던 것은 그때만 해도 동양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엔 반드시 일본 스파이들이 깔려 있었고 그것을 알고 있던 인촌과 설산은 말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목당은 자신의 견해를 다시 한 번 확신시키기 위해 먼저 귀국한 인촌에게 그런 편지를 썼던 것이다.
1944년 6월은 태평양전쟁에서나 유럽전선에서나 대세가 판가름 난 달이었다. 이때 연합군은, 북부 프랑스 노르망디에 전세를 결정짓는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마침내 독일로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기에 이르렀고 미군은 사이판 도(島)에 상륙하면서 마리아나 해전(海戰)에서 일본의 해공군에 재기불능의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이다. 그 전해인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 또한 이때의 승전으로 그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1944년 7월 코이소 쿠니아키(少磯國昭)의 뒤를 이어 제9대 조선총독이 된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부임할 무렵에는 이미 연합군의 반격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그해 8월에 파리가 수복되었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두 달 뒤인 10월에 미군이 필리핀의 레이테만(灣)에 상륙, 11월에는 사이판 도를 기지로 삼은 미 공군 29대의 대편대와 함재기들이 도쿄(東京)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 본격적인 대폭격을 시작했다.
1945년 4월에는 오키나와를 빼앗기고 8월 6일에는 히로시마, 9일에는 나가사키에 저 유명한 원자탄 투하가 있어 일본은 공전의 대참사를 입었고, 이미 일본 해·공군은 전멸되다시피 한 상태여서 미군의 29대와 함재기들은 아무 저항 없이 일본 상공을 누비며 대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8일에는 소련이 뒤늦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소련군은 8월 9일 새벽 두만강을 건너 경흥(慶興)으로 들어왔고 나진(羅津)·웅기(雄基)·청진(淸津) 등에도 폭격이 감행됐다. 그만큼 소련군의 진격은 예상보다 빨랐다.
이렇게 일본이 패망을 눈앞에 둔 무렵 목당은 향리 송호정(松湖亭)에서 적적한 생활을 하면서 우편으로 부처 오는 매일신보(每日申報)를 통해 소련의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알고 소련군이 나진 방면에 상륙하였다는 소문을 듣는 정도였다. 서울에는 매일같이 공습경보가 요란하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려 왔다.
목당은 이러저러한 소식을 들으면 꼭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을 비롯하여 소개해 와 있는 셋째 담(潭) 부부와 외아들 병인(秉麟) 내외에게도 일러 주면서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만다는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 서울 나들이도 있었지만 목당의 사교범위는 구미(歐美) 유학생 몇몇이나 인촌댁(仁村宅)을 드나드는 일부 인사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주변 인물들은 거의가 일찍부터 일본의 패망을 간파하는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풍부한 미국의 물적(物的)·인적(人的) 자원과 그들의 앞서가는 과학의 힘을 믿는 것이었다. 거기에 비할 때 유기 그릇·금반지 하다못해 숟가락까지 공출해가는 일본의 작태란 종국적으로는 상대가 안 되지 않는가. 일본의 패망의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목당은 혼자서도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8월 16일은 왔다.
일본 천황은 목멘 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방송하였다. 매호동(梅湖洞)에서 영천읍으로 가는 신작로에는 벌써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몰려가는 젊은이들로 법석을 이루었다. 조국은 확실히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었으나, 젊은이들의 만세소리를 들으며 목당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지내온 설산과 연천(連天) 농장에 우거하고 있을 인촌, 그리고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가 머리에 떠올라 곧 서울로 올라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서울에 올라가봐야 되겠습니다.”
목당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목당은 지체 없이 경부선 열차에 뛰어올랐다. 해방된 조국에서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열차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정경이었으나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드디어 서울에 도착 - 해방된 서울의 밤거리는 등화관제에 젖었던 목당의 눈이 아니라도 너무나 환했고 시민들의 발걸음은 힘차고 가벼웠다. 어느새 완장을 두른 학생들이 보안대(保安隊)를 조직하고 치안을 돕고 있었다.
“끝내 이 민족은 되살아났구나!”
학생들의 활기찬 모습에서 다시 한 번 감격을 맛보는 목당이었다. 참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감격이 아니랴. 이렇게 조국 해방의 날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것이 37세였는데 그 후 10년의 은둔생활로 반생이 지나버린 것이 아닌가. 그동안 목당은 무슨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으며, 따라서 어떤 목표도 세울 수 없었다. 식민지민의 생활은 그런 것이었다. 다만 막연히 ‘무슨 일이든 해야지’ 하는 생각에 쫓길 뿐이었다.
그러나 조국이 해방된 공간에 서 있는 지금은 달랐다. 그동안 그가 접촉해 온 구미 유학 인사들, 그리고 인촌과 설산 주변 인물들, 그들이 신생 조국을 떠받들고 나가게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렇게 되면 그에게도 어떤 역할이든 주어질 것이었다. 다만 자기를 내세우기 싫어하는 목당은 서두르는 일이 없이 조용히 기다리기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륜동 집에 도착하여 들은즉,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 권한을 인계받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을 뿐 아니라 치안유지를 위해 학생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소식만 있을 뿐 인촌·고하·설산의 활동은 전혀 알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다음날 목당은 제기동 집으로 갔다. 그곳에 가면 시국이 돌아가는 형편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날 목당은 설산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았다. 총독부가 먼저 고하에게 정권 인수 교섭을 해왔으나 거절했으며, 그 후 여운형에게 교섭이 가자 그가 이를 수락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8월 11일 고하는 경무국 보안과장 이소자키(磯崎)와 조선군 참모 가미사키(神崎)로부터 치안을 맡아 준다면 권한을 넘겨주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의 항복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지 않은가. 이에 고하는 “소련군쯤은 천하무적인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격퇴하여 버릴 것이니 후방의 치안 문제는 크게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오”라고 딴전을 피우면서 자신은 건강이 좋지 않아 그런 일을 맡을 수 없다고 즉석에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14일에는 경기도 지사 이쿠타(生田)의 요청으로 고하는 다시 지사실에서 그와 만났다. 칠순의 이쿠타는 경찰부장 오카(岡)가 배석한 자리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항복을 인정하면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협력해 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른다.
“승낙만 해준다면 필요한 권한을 당신에게 맡기겠소.”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끄나풀 기능을 해낼 허수하비 정부를 세우려는 저의를 가진 것을 모를 리 없는 인촌과 고하가 그따위 잔꾀에 넘어갈 리는 만무하였다. 이렇게 되어 고하에게 맡기려다 실패한 치안유지를 다음에 교섭한 것이 여운형이었던 것이다.
15일 아침, 정무총감 엔도(遠藤)는 몽양을 그의 관저에 초대하여 일본이 그날 정오를 기해 항복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소련군이 17일 오후에는 서울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한국은 한강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분할 점령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 정치범을 석방할 것이므로 치안 유지에 협력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몽양은 건국 활동에 간섭하지 말 것 등 5개 항목의 요구를 제시, 합의를 보자 이를 수락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몽양은 그길로 원서동의 고하를 찾아가 협력을 요청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했다고 하나 군사력과 경찰권은 그대로 갖고 있는 한 우리가 그를 물리칠 힘이 없는데 총독부를 상대로 행정권을 이양 받는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심부름을 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몽양은 경솔하게 나서지 마시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소. 고하, 당신이 협조를 거부한다면 나는 민세(民世)(安在鴻의 호. 1891~1965년. 역사학자·독립운동가. 일제식민지 시기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등을 역임)와 함께 내 신념대로 행동 하겠소.”
이렇게 되어 그날로 몽양의 건국준비위원회는 발족되고 말았다.
한편 북쪽에는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소련군이 계속 진격해 들어와 8월 말엔 평양을 비롯한 5개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9월 상순엔 이 지역에 인민정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미군의 진주(進駐)를 기다려 행동을 취하려던 민족진영은 진주가 예상 밖으로 늦어지자 이에 대처하는 새로운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민족진영 각 정파의 난립이 그것이다. 즉, 고하를 중심으로 한 국민대회 준비회는 김성수(金性洙) 서상일(徐相日) 김준연(金俊淵) 장택상(張澤相) 안동원(安東源) 설의식(薛義植) 김동원(金東元) 고창일(高昌一) 등이 모여서 뭉치는가 하면(비정당),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이 뭉쳐 원세훈(元世勳) 김병로(金炳魯) 백관수(白寬洙) 이인(李仁) 나용균(羅容均) 함상동(咸尙洞) 김용무(金用茂) 박찬희(朴瓚熙) 박명환(朴明煥) 현동완(玄東完) 정광호(鄭光好) 김약수(金若水) 등이 모이고, 한국국민당의 이름으로 장덕수(張德秀) 김도연(金度演) 백남훈(白南薰) 허정(許政) 최윤동(崔允東) 이운(李雲) 홍성하(洪性夏) 이순탁(李順鐸) 구자옥(具磁玉) 유억겸(兪億兼)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등이 중추를 이룬 정당이 각각 발족된다.
인촌과 고하를 둘러싼 국민대회 준비회는 지금은 충칭(重慶) 임시정부 지지노선이 있을 뿐 정당을 만들 때가 아니라는 판단 아래, 9월 4일 서상일 김준연 설의식 장택상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지지를 내세운다.
그러나 곧 있을 줄 알았던 임시정부의 환국이 기약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뀐데다가 좌익계열이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전술로 나오므로 그들은 할 수 없이 환영준비위원회를 개편하여 9월 7일 국민대회 준비회로 발족하기에 이른다.
목당은 이즈음 설산을 통해 정계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목당과 가까웠고 구미유학파 인사들은 모두 한국국민당에 가담하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민족진영의 중진인 인촌과 고하는 임시정부 지지를 표명하고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하는 선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당은 영국의 의회정치를 보아 온 사람이었다. 영국에서 정당정치가 뿌리내리고 민주정치가 구현되기까지 얼마나 큰 시련이 있었고 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던가. 근대 정치의 훈련이 안된 국민을 상대로 하면서 정권쟁탈전에 끼어든다는 것은 목당으로서는 처신할 바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석와 또한 목당의 그런 신중론에 동조해 주었다.
9월 6일 저녁, 좌익진영은 제동에 있던 경기고여(京畿高女, 현 창덕여중고) 강당에서 자기네끼리 소위 전국인민대표자회의(全國人民代表者會議)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인공) 수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주석 이승만(李承晩),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許憲) 등의 소위 정부 조직까지 발표하였는데, 본인들의 승낙도 없이 민족진영 인사들의 이름을 내세워 소위 벽보내각(壁報內閣, 당사자들과 상의 없이 각료 명단을 멋대로 작성해 벽보를 붙였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대부분이 참여를 거부했다)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전투적인 태세를 취하고 나서자, 이 같은 공산세력과 대결할 수 있는 강력한 민족정당의 탄생이 무엇보다 시급하게 요구되는 이런 상황에, 태동중인 한국민주당과 국민대회 준비회가 공동으로 9월 16일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대강당에 모여 마침내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결성을 보게 된다.
이에는 한국 사회의 지식층을 대표하는 거의 모든 저명인사들이 망라되었고, 물론 목당의 이름도 들어 있었으나 그는 적극적인 참여는 여전히 삼가는 태도를 취했다. 표면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목당은 정치 일선에 나서느니보다 자신의 능력을 실질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일이 뭔가 따로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