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22]일본의 진주만 기습, 더욱 피폐해진 조선

2016-06-29 08:0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22)
제1장 성장과정 - (17) 주변(周邊) 사람들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41년 12월, 일본은 놀랍게도 미명(未明, 날이 채 밝지 않은 때)에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2차 대전은 기어이 태평양 방면으로 확대되었다. 서전(緖戰, 전쟁이 시작될 무렵의 처음에 하는 싸움)에서의 일본군의 승리는 압도적이고 화려했다. 그러나 장기전(長期戰)으로 들어갈수록 일본은 자원(資源) 특히, 석유의 부족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미국 내의 일본 자산(資産) 동결, 대일 석유금수(石油禁輸) 등 난관을 타개하려고 외교 교섭을 벌였지만 실패로 끝나자, 마침내 초전박살의 결의로 미국에 기습을 감행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발발을 라디오 방송으로 들으면서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가슴이 싸늘해졌다. 그는 곧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의 방으로 건너갔다.

“아버님 일본이 미국을 기습했습니다.”

“어떻게 되겠어?”

“오늘의 전쟁은 자원전쟁(資源戰爭)인데 일본은 고작 점령지 자원을 가지고 전쟁하겠다고 나선 데 비해 미국은 국내 자원이 무진장한 나라입니다.”

석와는 아들이 늘상 말해 온 이야기라 익히 알고 있는 터였으므로 그 이야기는 더 묻지 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제의 시달림에 지칠 대로 지친 형편인데 또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앞서는 석와였던 것이다.

둘째 홍(泓)은 교토제대(京都帝大, 현 교토대학) 경제학과를 나와 대구도청(大邱道廳)에 잠시 나가다가 뛰쳐나와 서울 종로 5가에 금수사(金水社)란 간판을 걸고 신탄상(薪炭商, 땔나무나 숯 따위를 파는 장사, 또는 그 가게나 장수)을 하고 있었다. 벌채(伐採)한 뗏목을 한강에 띄어 서울로 운반해 와 처분하는 일로, 규모가 제법 커서 대장부로서 승부를 걸 만한 사업이었다. 삼청동에 사는 셋째 담(潭)도 형이 하는 금수사에 나가 일을 돕고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그리고 막내인 호(湖)는 도쿄제대(東京帝大, 현 도쿄대학)를 나와 순천 지방법원 검사로 있다가 서울로 올라와 경성 지방법원 경제과 검사로 있었다. 조선인 출신의 검사가 배치되기는 어렵다는 경제과에서 일인(日人) 검사들의 질시를 받기도 했지만 워낙 성품이 곧아 누구도 트집을 잡지는 못하고 있었다.

석와로서는 자식들이 제 몫은 다하고 있어서 따로 자식들에 대한 걱정은 없었으나 재산가(財産家)로서의 치산(治産, 재산의 관리·처분)은 어렵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목당은 시국으로 보아 서울 나들이를 줄이기로 하고 한동안 시골집에만 박혀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불쑥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와 김양수(金良洙)가 시골까지 찾아오지 않았던가. 참으로 반가운 손님들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왠일이오!”

“영천 쇠고기나 실컷 얻어먹자 해서 왔소.”

1942년으로 접어들면서 조선 사람들의 고초는 더욱 말이 아니었다. 인적·물적·정신적 고난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여서, 공출과 징용은 날로 강화되고 물자는 모자라서 민중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기아선상(飢餓線上)을 해매고 있었다.

주식인 쌀은 물론이요, 비누·양말·생선 등 생활필수품은 모두 배급제도 아래 통제되어, 그중에서도 쇠고기·생선 등 육류(肉類)는 한 달에 한 번씩 애국반(愛國班, 일제강점기 전시체제하였던 1938년 7월 7일 조선인의 생활을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단위로 나오는 것을, 그 반에 속해 있는 세대들이 나누어 먹고 있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상이었으므로 설산의 그런 농담은 나올 만한 농담이었다.

목당은 귀한 손님을 맞아 온 집안이 법석일 지경으로 들떠 있었다. 김양수는 설산과 미국서 삼일신보(三一申報)를 같이 내고 있었던 동지이자 막역한 사이였다. 그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인촌가(仁村家)와도 세교(世交, 선대 때부터 대대로 사귀어 온 교분)가 있어, 인촌이 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 한때는 동아일보 영업부장을 지내기도 한 사람이었다.

목당의 부인 이(李)씨는 음식 솜씨 좋기로 이름이 있었는 데다 정성을 다하여 차린 주안상은 과연 진수성찬 그대로였고, 거기다가 특등 가양주(家釀酒, 집에서 담근 술)가 곁들여져서 세 사람은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설산이 참기 어려운 수모를 이겨내고 있는 것을 곁에서 보아 알고 있던 김양수가 마침 방학을 틈타 그를 끌고 목당을 찾아온 것인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이야기는 한이 없었고 오랜만에 만난 지기(知己)들은 마시고 떠들고 허물없이 회포를 풀었다. 며칠 전의 이야기라면서 설산은 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경성제대(京城帝大, 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통론(法學通論)을 가르치다가 부산지검(釜山地檢)으로 내려가 사상검사(思想檢事)로 있는 이토 노리오(伊藤憲郞_라는 자가 마침 마산의 한목단(寒牡丹, 부산과 마한의 원전주조장에서 생산한 청주)을 가지고 왔으니 하루 저녁 한담이나 하자고 문학잡지 주간이던 최모(崔某)를 통해 그에게 청을 넣어왔다는 것이다.

모처럼 상경하는 길에 술을 갖고 왔다면서 청하는 터인데다 원래가 자유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그는, 부산으로 좌천된 자라는 점이 좀 꺼림칙하긴 하면서도 초청에 응하기로 했다는 것.

그런데 약속된 명월관(明月館)으로 가보고서야 설산은 자리가 한담이나 할 자리가 아님을 직감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초청 받은 사람이 자기뿐만이 아니고 춘원(春園, 문인 이광수(李光洙)의 아호. 1892~1950년 납북)과 현민(鉉民, 문인 유진오(兪鎭午)의 아호. 1906~1987년)까지 거기 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토가 꺼낸 이야기는 정치담(政治談)이었다. 최모가 옆에서 시국이 중대하여 조선인의 장래 문제를 위해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때가 왔다느니 변죽을 넣는 품이 아무래도 이토와 최모는 사전에 충분히 의논한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그따위 그물에 걸릴 설산은 아니었다. 그는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가볼 데가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소.”

그러자 일어서는 설산을 향해 최모라는 자가 중얼거렸다.

“오오모노다까라네(巨物이니까).”

설산은 엉뚱한 핑계를 대고 사람을 불러낸 왜놈 이토보다 최모라는 자의 소행에 더 맥이 빠지더라는 말로 이야기를 끝내고는 쌓이고 쌓인 울적한 심회(心懷, 마음속의 생각)를 술로나 풀려는 듯이 대취(大醉, 술이 몹시 취함)로 치달았고, 목당 또한 주량이 왠만한지라 세 사람은 이날 모두가 만취했다.

다음날도 해장술로 시작한 주연(酒宴)은 종일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 누구의 발상이었던지 “경주 최준네 집으로 가자!” 하여 세 사람은 또 경주로 떠났다. 순전히 울분을 못 이겨 부리는 객기였고 식민지민의 슬픈 모습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