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2]일본 이어 산업혁명의 영국 유학 결심

2016-06-22 16:3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2)
제1장 성장과정 - (7) 와세다 대학 입학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뜻은 크고, 그만큼 마음은 조급한 것이 청년 목당(牧堂) 이활(李活)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24년 3월, 신학기에 맞추어 일본 도쿄로 건너와 와세대대학(早稲田大學)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겨우 입학 수속을 마친 그였으니까.

중학교 졸업장이 없는 그는 와세대 대학의 별과(別科)에 밖에 입학이 가능하지 않았고 정식으로 학위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선 와세대 별과에 다니는 한편으로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애 다시 적을 두어야 했다.

더구나 도쿄는 전년도에 일어난 대지진의 피해 복구 사업이 한창이어서 분위기가 더없이 어수선했다. 다행한 점이 있었다면 와세다 대학 일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아 공부하는 데 큰 방해 요소가 없었다는 점일까.

와세다 대학은 조선 유학생들과는 인연이 깊은 학교였다. 이 대학은 그동안도 수많은 조선 유학생을 배출해 왔다. 다만 대지진과 관련하여 일인(日人)들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저 유명한 간토다이신사이(關東大震災, 관동대지진) 사건으로 많은 우리 유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바람에 조선 학생사회는 매우 음울하게 침체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때는 바야흐로 사회주의운동이 일본 전역에서 한껏 고조되고 있었던 시기로 조선 유학생들도 그에 발맞추어 사회주의 민족주의 운동을 현지에서 전개하고 있었다. 대지진 직후인 9월 2일, 일본 천황 암살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박렬(朴烈, 1902~1950년 납북)만 해도 흑우회(黑友會)라는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단체를 조직하여 이끌고 있었다. 김약수(金若水, 892∼1964년. 노동운동가·정치가.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 등 이론파(理論派)가 북성회(北星會, 1923년 1월 일본 토쿄에서 우리나라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 1926년 정우회에 폐합됨)를 조직하고 재일본 조선노동동맹(在日本 朝鮮勞動同盟)을 조직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목당에게는, 이런 조선 유학생 사회의 움직임에도 눈 돌릴 시간이 없어, 학문에만 열중하여 좀 더 많은 것을 배우는 일만이 급했다. 그에게는 다만 몇 명 친구와의 교분이 있었을 뿐인데 조헌영(趙憲泳, 1900~1988년. 민족운동가, 한의학자. 광복 후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약. 6.25동란 중 납북), 오희병(吳熙秉, 1901~1946년. 시인), 이구왕(李久王), 이의식(李義植) 등이 그들이었다.

조헌영은 영천과 이웃하고 있는 영양의 회제(晦齊, 이언적의 호. 1491∼1553년. 16세기초 태극을 우주의 체로 삼는 태극론으로 주자의 성리학 체계를 확립했으며, 그의 학문은 태계 이황으로 이어짐) 집안 장손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일도(一島) 오희병 역시 영양 출신으로 조헌영과는 단짝으로 지내면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인물들로서 이들은 틈이 나면 목당의 하숙으로 찾아주곤 하였는데, 이런 친교가 인연이 되어 뒷날 목당의 아우 담(潭)과 조헌영의 누이가 결혼까지 하는 인연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이의식은 오희병과 동창 관계로서 상하이 임시정부 이동녕(李東寧, 1869~1940년. 독립운동가·정치가·행정가.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서 이상설, 여준 등과 서전의숙을 설립했고, 1907년 귀국해 안창호, 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됐다)의 아들이었으며,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제나 장래 문제에 대하여 어떤 벽에 부딪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청년 목당의 심경이었다. 물론 목당만이 느끼는 좌절감은 아니었겠지만 신학문을 배우는 젊은이다운 웅지(雄志)는 크지만 학업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가서 그 뜻을 펴기에는 빼앗긴 조국의 상황은 너무나 암담한 실정인, 그들은 일개 식민지민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목당은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깊이 생각을 했다. 지금 귀국을 하여 우리 사회에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기에는 모든 여건이 너무나 갖춰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좀 더 학문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 끝에 그는 마침내 결론을 얻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공부한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학문을 하기로 하자. 그렇다!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지금 세계를 이끌고 있는 영국이 있지 않은가. 그곳은 내가가서 공부할 만한 적지(適地)이다.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나온 땅도 바로 영국이 아니냐. 아담 스미스에서 심지어는 마르크스, 엥겔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영국 사회를 한 모델로 하여 훌륭한 경제이론(經濟理論)을 수립한 것이 아니겠느냐.

영국 사회를 연구해 보고 그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실제로 보자. 그러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천해 갈 것인가,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 길이 나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목당은 이렇게 하여 영국 유학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