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20]일제의 창씨개명 요구 거부

2016-06-28 17:0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20)
제1장 성장과정 - (15) 끝까지 거부한 창씨개명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일제는 중일전쟁(中日戰爭) 장기화와 확전(擴戰)으로 조선에 대한 수탈과 핍박은 날로 극심해 갔다. 장기(長期) 소모전(消耗戰)의 수렁에 빠져든 일본은 중국의 끈질긴 항전에 부닥치자 초조할 대로 초조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귀국한 해인 1937년, 일본군이 중국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한 12월 17일의 일이다. 총독부는 이를 경축한다면서 전국의 각급 학교 학생들을 모두 동원하여 낮에 가두행진을 하게 하더니 밤이 되자 또다시 초롱불 행진을 벌이게 했다.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문제로 인하여 기독교계 학교들이 잇달아 폐교 처분되고,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세태는 날로 각박해져 갔다. 총독부는 조선인 명사들을 시국강연이니 방송 출연이니 하면서 동원하여 전쟁 수행에 협력토록 독촉을 해대는 등 온 민족을 이른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길로 내모는 데 혈안이 되고 있었다. 이름있는 인사(人士)치고 여기서 빠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일제는 물자만이 아니라 인적 자원(人的 資源)마저 식민지 조선에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첫 시도가 바로 1938년 2월에 공포된 육군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이었고, 이어 4월에는 조선어교육(朝鮮語敎育)을 완전히 폐지한다고 명령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5월에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이 공포되면서 세상은 경제통제하에 들어갔고 모든 분야가 무단총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939년 가을에는 유럽에서 마침내 대전이 터졌다. 1935년 재무장을 선언한 히틀러가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침략, 병합하고, 그해 9월에는 영국·이탈리아·프랑스 뮌헨 3국 회담을 빙자하여 체코슬로바키아(현재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됨)를 집어삼켰다.

그러자 일본은 독일에 접근하는 한편 뭇솔리니의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여 1937년 11월에 일본·독일·이탈리아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더니 한 수 더 떠서 3국간 군사동맹을 맺으려 나섰다.

그러나 1939년 8월 독일은 일본의 가상 적국인 소련과 불가침조약(不可侵條約)을 맺고, 9월 말에는 소련의 묵약(黙約, 말없는 가운데 뜻이 서로 맞음) 아래 폴란드를 침략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곧 폴란드에 편들어 독일에 대한 선전(宣戰)을 포고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목당은 시골집에서 구독할 수 있는 신문이란 모두 입수하여 한 구절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1939년은 참으로 긴박감이 도는 해였던 것이다. 10월에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이 내리더니 11월에 가서는 마침내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이 공포되었다. 일제의 민족말살(民族抹殺)정책은 끝내 창씨개명이라고 하는 민족적 모욕을 강요하기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즉 1940년 2월 11일, 그들의 이른바 기원절(紀元節, 일본 1대 천황인 진무천왕이 즉위했다고 하는 날로 일본의 건국 기념일)을 기하여 모든 조선인은 그때까지의 성씨(姓氏)와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명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은 조선 사람들에겐 상상도 못할 망칙한 강요였다.

이에 따라 목당가(牧堂家)에도 수난은 예외 없이 닥쳤다. 유교적 전통을 이어받아 가풍(家風)을 세우고 양반임을 자부해온 영천이씨(永川李氏) 문중을 대표하는 집안에도 창씨개명이라는 돌풍이 몰아친 것이다.

총독부는 강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경찰까지 동원하여 갖가지 협박을 가해왔다. 견디지 못한 조선인들은 불과 4개월 미만에 전 호수의 9할에 가까운 32만6000여 호가 창씨개명을 했으나 이에 만족할 리 없는 일제는 그 뒤 2년 동안 계속된 강요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영천경찰서(永川警察署)는 이씨네갸 그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이씨 성명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을 눈에 거슬려 한 것은 물론이다. 창씨개명 신고 마감이 다가온 6월 하순 어느 날, 경찰서장은 마침내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을 경찰서로 호출했다.

“이 선생은 왜 우리 일에 협력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지요?”

“창씨개명 말입니다. 이 선생댁은 자제분이 검사(檢事)로 있겠다, 사업도 크게 하는데 솔선하여 먼저 해야 할 입장에 있으면서 왜 여태 그러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석와는 호출을 받았을 때 이미 각오한 바가 있었다.

“내가 창씨개명을 안 하는 것은 별다른 이유는 없고 영천이씨는 이 고장에서 나까지 31대를 살아오는 가문이라는 걸 서장도 알고 있을 거요. 문중의 일을 나 혼자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소.”

창씨개명은 문중의 일이라고 석와는 핑계를 삼았던 것이다.

“문중은 문중이고, 어르신네부터 하시오, 당장.”

“그럴 수는 없소. 문중의 허락이 있어야 하오.”

“기어이 창씨개명을 못하겠다 그 말이군요?”

“문중 일이니까·····.”

“기일이 조금 남았으니 돌아가는 대로 잘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할 거요. 이 주사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들을 위해서도 말이오.”

석와는 그러나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않고 버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