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7]오징어·정어리 최대 수출품, 수산자재 부족 심각
2016-07-19 09:51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7)
제3장 재계활동 - (42) 대일 통상 문제 대두
제3장 재계활동 - (42) 대일 통상 문제 대두
![[목당 이활의 생애-47]오징어·정어리 최대 수출품, 수산자재 부족 심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16/07/19/20160719094842941819.jpg)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49년부터 실시된 수출할당제(輸出割當制)는 계획무역(計劃貿易)으로 수출입 균형을 이룩한다는 발전적인 조치였다.
1949년도의 무역실적을 보면 수출액 71억9500만원, 수입액은 88억5700만원으로 입초액(入超額, 수입초과액, 무역적자)은 16억6200만원이었다. 이는 1947년도에 비하면 수출입 모두 수배의 액수이며 입초액도 2배에 가까운 실적이었다.
내용으로 보면 수출에 있어서는 식료품이 69.3%, 원료자재 21.3%, 완제품(完製品) 6.3%였고, 수입에 있어서는 완제품이 49.1%, 원료자재 30.9%, 원료 16.2%, 식료품 2.7%를 차지하였으며 원료용 제품이 다소의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해방 후 정크무역, 마카오무역, 홍콩무역을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사람들이 파놓고 간 일부 광산물도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건(乾)오징어와 한천(寒天), 건새우·굴·해태·어간유(魚肝油, 명태·대구·상어 따위 물고기의 간장에서 뽑아낸 지방유) 등의 수산물이 태반을 차지했다.
해방 후의 활기띤 업종이 무역이었다면 무역으로 해서 밀물처럼 밀려온 것이 수산물의 호황(好況)이다. 해방은 온 겨레의 기쁨이기도 했지만 특히 복음(福音)을 누린 것이 어민들이었던 것이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합하면서 어업령(漁業令)을 통해, 또는 행정정리(行政整理)라는 구실 아래 거의 약탈에 가까운 강제적 수단으로 이왕가(李王家) 소유의 4대 황금어장(黃金漁場)을 시이나(推名)라는 특정 일본인에게 넘겨주는가 하면 어업 이권과 유리한 어장도 모조리 일본인들의 소유로 만들었다.
정부무역으로 수산자재의 구매가 이루어지고, 협회는 자재의 할당이나 금융 문제를 담당하고 있었다. 수출에서 수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연평균 70%에 가까웠으며 그 가운데서도 오징어가 80%를 차지했다. 해방 후 오징어의 어획고는 기록적이어서 전날의 정어리 어업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 대신 들어온 물품 가운데 낙화생이 80%를 차지했으니 초기무역은 오징어와 낙화생 무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무역에서 어찌나 어두웠던지 오징어의 수출시세, 세관장부가격(稅關帳簿價格)을 보면 근당(斤當) 1946년에는 10원이었던 것이 1947년에는 400원, 그 이듬해인 1948년 1300원으로 뛰고 있을 정도로 놀라운 가격 등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플레가 격심했다고 해도 이는 우리 경제가 얼마나 대외 경제와 단절되었던 가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최초의 수출선이었던 화신무역(和信貿易)의 앵도환(櫻桃丸)이 20만 근의 한천을 적재하고 홍콩에 나갔을 때도 국내에서의 가격은 근당 1달러 50센트인 것을 25달러에 팔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무튼 수산업의 자재 공급이 정부무역으로 공급되고 있었으니 업계로서는 불평이 없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