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53]동생 홍 납북·어머니 별세, 고통의 시간

2016-07-20 09:54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53)
제3장 재계활동 - (48) 어머니를 여의고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7월 하순이 되어 나익진(羅翼鎭) 전무가 목당(牧堂) 이활(李活)이 피신해 있는 후암동 집을 찾아왔다. 목당의 주변은 삭막했다. 찾아 볼 친구 하나 없었고 나날이 살얼음판을 걷는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폭격은 점점 심하여 갔고 공산당들의 극성은 갈수록 더해갔다. 이미 유엔군이 반격을 개시하여 북상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우군 비행기의 폭격이 날로 더해가는 것이 그만큼 전세가 유리해져 가고 있다고도 했다. 뭔가 기미가 다른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목당이 가장 궁금한 것은 그러한 소문들의 진부(眞否)였다. 그러나 외출이 불가능한 상태로 숨어 사는 처지에 나 전무인들 정확한 전황을 알 리 없었다. 다만 목당은 대전에서 ancy 대사가 “미국은 한국을 수호할 것”이라는 방송을 했다는 사실만 전해 들었고 모든 희망이 미국의 태도와 유엔 한국위원단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전무의 이야기로는 김익균(金益均) 부회장이 단파방송으로 들은 바로는 7월 2일 유엔 가맹 36개 국이 대한 무력원조 지지성명을 냈고 7월 7일에는 유인 안보이사회(安保理事會)까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안을 가결하였으며,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가 총사령관에 취임, 13일에는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을 한국 파견군(韓國 派遣軍)사령관에 임명하였다는 것이니 이미 유엔군은 한국 전선에 배치되어 총공격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목당은 나 전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런데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부산 교두보를 사수할 결의를 명백히 한 것은 8월 4일에 가서였던 것이며, 10일 동안의 9월 공방전에서 괴뢰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음으로써 승리에 대한 망상을 잃은 것은 이때에 가서였다.

마침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그러나 나 전무가 다녀간 뒤로 거리의 검문은 더욱 심해졌고 의용군을 뽑아 가는가 하면 밤이면 폭격에 의한 복구작업에 주민들을 끌어내는 통에 목당의 신변도 더욱 위험하게 되었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위태로운 일이어서, 동구릉 과수원지기 집에 숨어 있기도 하면서 목당은 거처를 옮겨가며 잠복하기 시작했다.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9월 28일에는 서울을 완전 탈환하였다. 29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와 함께 서울에 돌아옴으로써 정부는 적침(敵侵) 3개월만에 마침내 서울로 환도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목당이 명륜동집에 들렀을 때는 식구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집을 나간 아우 홍(泓)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목당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다고 찾아나선들 어디로 찾아나설 일도 아니잖은가. 그들은 후퇴하면서 요인들을 납치해 갔다면 홍도 필경 그 대열에 끼여 있었을 것이었다.

10월, 대구폭동 땐 담(潭)이 위기일발에서 죽음을 모면했었는데, 이번엔 홍을 영영 잃고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그대로 들어맞고 말았다.

한편 모친 손(孫) 부인은 1950년 5월, 75세의 생일을 맞고 있었다.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보다 5세 위였는데 평소에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 터에 6·25 난리를 겪고 둘째 홍이 납치당하자 정신적인 타격이 컸던가 모친은 마침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리고 주치의(主治醫)였던 안국동의 고영순(高永珣) 박사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10월 15일 손 부인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직동 빈소엔 전시중이었지만 많은 문상객으로 붐볐고 장지를 우선 망우리로 잡아 5일장을 치뤘다. 담은 영등포에서 산소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호(澔)는 육군 준장, 대검 검사로 있었으므로, 홍이 납치되는 사건만 없었더라면 손 부인은 좀 더 수(壽)를 누렸을지 모를 것인데 애석한 일이었다.

목당은 그동안 지성을 다하여 어머니의 간호를 해왔고, 난리중이라고는 하지만 성대히 장례식을 치름으로써 효성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