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내항시리즈)첫번째 이야기…인천내항 어떤곳인가!

2016-06-20 06:00

인천내항 개발을 둘러싸고 개발의 전권(全權)을 거머 쥔 해양수산부와 지역 주민들이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지리한 공방을 계속하고 있다.

양측은 내항의 재개발이라는 필요성에는 서로 공감하고 있지만 개발 방향과 방식을 놓고 입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인천내항은 한때 인천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번영을 구가했다. 하지만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시대적 요구에 밀려 부두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이같은 환경을 바꾸기 위해 인천내항은 재개발을 통한 변신을 꿈꾸고 있다.
 
특히 인천내항의 1·8부두는 현재 지역의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아주경제는 이 부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4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⓵인천내항 어떤곳인가! ②인천내항 어떻게 변화해 왔고 어디까지 와있나! ⓷인천내항 개발을 둘러싼 해수부와 지역주민들의 시각은? ④ 김홍섭 인천중구청장 및 주민대표 인터뷰 (편집자 주)

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인천시 중구에 위치한 인천내항은 1883년 조선 고종임금 2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갑문식 항으로 개항하면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청·일·러는 물론 구미 각국의 조계지가 자리잡으며 국제적인 도시로 급변했다. 그러며서 항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당시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열강들의 입장에서 인천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워낙 커(9m) 항구로서의 기능발휘가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갑문까지 설치하면서 부두를 건설한 것은 이같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이후 한양의 관문이라는 이유가 더해 지면서 인천의 중요성은 계속 유지됐다. 인천항 제1갑문은 1918년 세워졌다. 60여년만인 1974년에는 아시아 최대규모의 제2갑문도 준공됐다. 이후 인천항은 대한민국 수출입 및 산업화의 주역으로 입지를 굳혔다.

이에따라 인천의 중심은 인천 중구가 되면서 인천시청(현 인천 중구청 자리) 및 각종 주요관공서가 위치했다. 여기에다 각종 항만관련 업종들이 함께 들어서면서 인천항과 중구는 그야말로 전성시대를 맞게된다.

양지가 있으면 당연히 음지가 있듯이 이 과정에 인근 지역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8개부두 48개선석으로 운영되는 인천내항을 통해 오가는 각종 수출입품(고철,석탄,각종잡화등)에서 발생하는 각종 먼지,소음,쇳가루,교통체증 등의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천내항전경[1]


관계 기관에 대책마련을 수년간 요구했으나 구조적으로 어떤 대책도 별 신통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이지역은 거주하기 가장 불편한 곳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주민들의 또다른 고통은 인천항의 발전과 더불어 호황을 누려온 하역업체들의 전횡에 따른 정주권상실 및 각종 오염물질로 인한 피해였다. 주민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 졌다. 여기에다 인천항이 급격하게 팽창되는 과정에서 하역업체들의 각종 비리사건들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 때문에 지역주민들의 명예도 도매금(?)으로 실추되고 매도되는 수모를 받기도 했다.

여기에 또다른 악재(?)까지 겹쳤다.

1985년 인천시청이 당시 신도시였던 남동구로 옮겨갔다. 이를 시작으로 각급 공공기관이 그 뒤를 이었다. 여기에다 남동공단의 준공등과 맞물려 기업체들의 이전도 가속도가 붙었다. 이 과정 속에서 인천 중구를 비롯한 인천항의 공동화(空洞化)는 시작됐다.

이후 주민들은 인천항으로 인해 최악의 생활환경과 도시공동화에 따른 상권위축등의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한계 상황에 처한 주민들은 인천내항 재개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지난 2007년10월 7만2000명의 서명이 담긴 국회 청원을 비롯, 고공 시위와 원도심 총궐기대회 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고충을 토로했다.

주민들의 계속된 요구에 대한 구체적인 답은 마침내 2013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3년 5월28일. 해양수산부는 ‘내항 재개발 로드맵’을 확정 발표했다. 이 시점부터 사업이 점화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