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해진 권오갑 사장 “노조와 논의 중단”, 현대중공업 노사갈등 재점화
2015-05-12 06:00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노사간 논의를 일체 중단하겠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이 입을 꽉 물었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권 사장 명의로 지난 4월 23일 노조 앞으로 보낸 공문을 통해 “대표이사 자신과 회사의 인사정책, 경영권을 부정하는 노조측과 노사간 협의체계를 지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대화 중단을 선언했다고 주장했다.
노조도 지난달 24일 3000여명의 조합원(노조측 추산)이 참여한 가운데 노사관계를 파행으로 이끈 권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등 강경대응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 2월 2014년 임금 및 단체협상을 마무리하며 잠잠해질 듯 했던 분위기가 다시 대립 양상으로 치달은 것이다. 회사 한 관계자는 “이번에는 루비콘 강을 건넌 것 같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권 사장과 노조 모두 감정을 터뜨린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여사원 희망퇴직 및 직무전환’ 문제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3월 15년 이상 장기근속 서무직 여사원 600여명을 대상으로 희망자를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접수 받았다. 희망퇴직이 이뤄질 경우 최대 40개월분의 급여와 자기계발비 1500만원을 일시금으로 지급받게 되며 장기근속 포상 및 명예승진 등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앞서 1960년대생 사무직 과장급 이상 직원 1500여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이 가운데 1000여명이 회사를 떠난 직후였다.
접수결과 노조는 서무직 여직원 170여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추가 정리해고라고 반발했으나, 사측은 정확한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또한 사측은 지난 과장급 직원 희망퇴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사원들이 자신들도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견을 제안해 진행한 것일 뿐 인력 구조조정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남은 여사원들에 대한 직무전환교육이 충돌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됐다. ‘직무역량향상프로그램’이라는 명칭으로 사측이 추진한 이 교육은 경리·서무 등 단순 업무만 맡고 있는 여직원들에게 자기계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한다는 취지로 이뤄졌다. 이에 첫 교육 주제가 컴퓨터지원설계(CAD)였다.
일부 여직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노조도 합세했다. 10년이 넘는 근속기간 동안 본연의 업무만 진행해 온 직원들에게 느닷없이 새로운 일을 맡김으로써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원들을 내쫓으려는 한다는 것이다. 이에 사측은 해당 직무에 과다한 인원이 배속돼 있는데 반해 수요가 많은 설계인력은 부족한 실정이라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한 뒤 능력을 쌓으면 전환 배치해 현재보다 나은 처우를 보장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희망자에 한해 실시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노조, “사측 총 7차례 걸쳐 정리해고 한다” 폭로
양측간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는 지난 2월 사측이 작성했다는 문건 하나를 입수했다며 이를 공개했다.
‘경영진단 의견서’라는 대제목에, ‘전사 2차 및 3차 구조조정안’이라는 부제목을 단 이 문건은 ‘최고경영층의 의지를 적극 반영하였으며, 1차 보다 신속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 각 사업본부 별 시행 준비 철저 및 대상자 선정 작업에 만전을 기할 것. 특히 언론 노출에 대해서는 절대 주의할 것’이라는 지시문으로 시작됐다.
내용의 핵심은 인력 구조조정의 단계다. 요약하면 △1차 과장급 이상 △2차 서무직 여사원 △3차 14년 이상 근무한 차장, 부장 △5차 조직 비적응 4급 대리 및 고과 C, D 및 미진급자 △6차 생산직 파업 참가자 △7차 생산직 장기 미진급자 및 고과 C, D등급자 등 단계별로 인원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문건 대로라면 향후 사측은 지속적으로 종업원을 줄이겠다는 뜻이다.
문서가 공개되면서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희망퇴직으로 위장한 대규모 정리해고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노조를 중심으로 한 권 사장 퇴진요구가 조직화 한 것도 문건이 공개되면서부터다.
사태가 확산되면서 지난달 20일부터 시작하려고 했던 1차 CAD 교육이 연기됐다. 사측은 15일 교육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고 교육을 강행하려고 했으나 조합원들의 반발 및 권 사장 퇴진운동 결의 등이 진행되자 향후 일정을 밝히지 않은채 연기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이에 대해 노조측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문건 유출에 사측이 크게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측은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노조에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결정했다. 권 사장이 직접 나서서 노조와의 대화 중단을 밝힌 것도 이의 연장선상이다”고 설명했다.
5월부터 국내 주요 사업장은 2015년 임·단협 협상, 즉 ‘하투(夏鬪)’가 시작된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20년 무분규 전통도 깨가며 지난해 임·단협을 9개월 만에 간신히 합의했다. 아직 통상임금 이슈도 마무리 되지 않은 가운데, 정리해고 문제에 권 사장 퇴진 요구 및 노사간 대화중단까지 겹치면서 올해 임·단협은 작년보다 더 험난한 일정을 치러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조는 조선업종 노조연대와 함께 오는 30일 거제도에서 2015년 임금협상 승리를 위한 공동투쟁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 울타리를 넘어 조선산업 전반의 문제로 확산시키겠다는 것이다.
◆권 사장, “종이호랑이 살리기 위해 희생 감내해야”
이에 대해 사측은 노조의 주장을 이해는 하지만 그들의 요구를 100% 받아들일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사측 관계자는 “울산 조선소에는 회사에 출근해 거리 청소를 하는 과장급 직원의 연봉이 1억원에 달한다. 이들이 한 두명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 고연령 직원들의 상사들이 젊은 팀장들이다. 그들이 어린 팀장의 말을 듣겠는가”라며 “젊은 직원들의 불만도 크다. 이들이 회사에 활력을 불어넣어줘야 하는데 아버지 연세와 비슷한 선배들이 위를 모조리 장악하면서 모험을 기피하라고 가르친다. 현재 회사는 공기업보다 더 경직돼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주주를 비롯한 경영진들은 현재 회사를 ‘종이호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창사 이래 가장 큰 위기 상황이다. 심각하다. 망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최길선 회장과 권 사장의 목소리는 갈수록 다급해지고 있다”며 “현대중공업은 세계 1위 조선업체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고임금·장기 근속자층이 너무 많아 세계 최고를 자랑했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화를 개혁하지 않으면 향후 2~3년 내에 회사는 무너질 수 있다. 지금 노조에 밀리면 생존할 수 없다. 권 사장의 강경한 태도는 이러한 위기감 때문이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