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워싱턴 역사와 함께

2015-01-11 05:46

아주경제 워싱턴 특파원 홍가온 기자 =슬쩍 보기만 해도 오래된 건물이 틀림없다. 외벽의 페인트칠은 여기저기 벗겨져 있고 깨진 창문 한쪽은 대충 테잎으로 바람구멍을 막아 놓았다.

출입문이고 창문이고 온통 무거운 쇠창살로 막아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둡고 좁은 공간에 각종 물건들이 빽빽히 차 있다.

진열대에는 아이들 과자에서부터 어른들 술안주가, 그리고 냉장고에는 각종 맥주와 싸구려 술이 가득 들어차 있다.

깔끔하게 인테리어도 바꾸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비용이 너무 커 엄두가 나질 않는다.

가게 주인과 손님의 사이에는 어른 두손을 합친것보다 두꺼운 방탄유리가 가로막고 있다.

물건을 골라 계산을 하려면 방탄유리 밑에 뚫린 좁은 공간 속으로 돈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러면 주인은 다시 그곳으로 거스름돈을 돌려준다.

어떤 곳은 방탄유리벽에 조그만 회전문을 만들어 놓고 물건을 받아 스캔하고 계산을 해주기도 한다.

입구 안쪽도 그렇지만 밖에는 손님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어떤 때는 가게에서 사온 맥주를 마시고 가게 앞에 병을 집어던져 유리병이 산산조각이 나기도 한다.

술에 취한 일부 손님은 가게 벽에 노상방뇨를 하기도 일쑤다. 이런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가게 주인의 몫이지만, 자칫 총이라도 맞을까 조심스럽기만 하다.

재수없는 날에는 마약에 취한 손님이 찾아와 다른 손님과 싸움을 벌이거나 매장을 마구 뒤엎어 놓기도 한다.

경찰이 출동해 해결해 주긴 하지만 그날 장사할 맛이 뚝 떨어진다. 가장 끔찍한 것은 강도다.

총기소지가 자유로운 것도 있지만 불법으로 총기를 갖고 있는 이들이 워낙 많아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총격이 벌어지고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경찰이 수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며칠동안 장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것은 워싱턴DC에서 힘겹게 장사하며 살고 있는 한인 소상인들의 이야기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내 소규모 편의점 업주의 60% 가량이 한인이라고 한다.

근래에 가게를 차리고 영업을 시작한 곳도 많지만 대부분은 오래전 이민 온 한인들이 마련한 삶의 터전인 경우이다.

미국 사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고, 어려운 고비도 여러번 넘긴 그들이다.

은퇴할 나이도 훨씬 지났지만 손주들 줄 용돈 몇푼 벌겠다고, 또는 '놀면 뭐하냐'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요즘 만나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이제 그만 문을 닫아야겠다'고 한다.

워싱턴DC 소상인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대형유통업체인 월마트가 들어오는 바람에 손님이 뚝 끊겼다.

얼만 안 있으면 4번째 월마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이다. 대형유통업체와의 경쟁은 애초부터 '게임이 안된다'.

게다가 총기 강도사건도 줄질 않고 있다. 워싱턴DC 옆 메릴랜드에선 얼마 전 한인이 운영하는 리커스토어에 권총을 든 강도가 들어와 주인을 쏘고 돈도 빼앗아 달아났다.

젊었을 때야 혈기가 왕성했으니 총구를 머리에 겨눠도 맞서 싸웠지만 이제 남은 인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다.

워싱턴DC의 한인들은 그렇게 꿋꿋히 버티며 살아왔다. 미국의 수도와 함께 근대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이제는 조용히 떠나고 싶다.

일부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할 부분이었다고는 하지만, 워싱턴DC의 역사와 함께 했던 이들 한인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게다라 올해부터 워싱턴DC 내 동양계 주민 및 상인들을 지원하던 담당국장이 바뀌었다.

워싱턴DC 시장실 산하 아시아 태평양계 주민담당국의 한인 국장이 시장이 새로 바뀌면서 8년동안 해왔던 국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한인이 국장이어서 관내 한인상인들의 입장을 시정운영에 잘 반영했던 인물이었던 터라 그녀의 퇴임이 더욱 아쉽기만 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계를 위해 조그마한 가게 구석에서 손님을 맞아야 할 한인 업주들의 안전과 권익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방안 마련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