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를 읽다(25)] 황제의 나루터에서 제3 성장축으로 – 톈진
2014-11-05 07:00
톈진은 '하늘의 나루터'라는 뜻이다. 명나라 때 주체(영락제)가 이 나루를 건너 대운하를 따라 수도 난징으로 쳐들어가 조카인 건문제의 자리를 빼앗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하늘의 아들(천자)이 건넌 나루'라는 뜻으로 톈진이란 이름을 하사한 데서 유래했다.
‘하늘의 나루터’답게 톈진은 물의 도시다. 화이허(淮河)강 하구와 보하이(渤海)만 연안에 자리 잡고 있어 강과 바다에 동시에 맞닿아 있다. '중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황허(黃河)도 한때 톈진을 통해 바다로 흘러나가기도 했다. 수 나라 때 징항대운하(京杭大运河)가 완공된 이후 톈진은 남방의 식량과 물자의 운송을 위한 항구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베이징이 수도가 된 원 나라 때부터는 징항대운하를 통한 조운과 해운의 급속한 발전으로 톈진은 강남 지역의 소금·차·식량·비단 등을 베이징으로 운송하는 물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톈진은 베이징으로 통하는 해상관문으로 군사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하지만 톈진은 근대화 시기 파란만장한 역사 굴곡을 겪었다. 톈진은 1858년 영·불 연합군에 이어 1900년 러시아·이탈리아 등 8개국 연합군에 침략당해 서구 열강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톈진엔 최대 영·프·미·독·일 등 9개국 조계지가 들어섰다. 당시 총 조계면적은 무려 2만3350무(1무(畝)=200평)으로 여의도 2배 면적에 가까웠다. 하이허 강변과 마창다오(馬場道) 등지로 조계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개항 후 톈진은 중국 북방 최대 개방도시가 됐다. 톈진은 당시 서구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하자는 양무(洋務)운동의 중심지였다. 군사·철로·전보·우편 등 방면에서 근대화가 진행되며 중국 제2대 상공업도시 및 북방 최대 금융 및 무역 중심도시가 됐다. 당시 조선도 유학생을 톈진에 파견해 근대 문물을 학습하도록 했다.
하지만 톈진은 중국 최초의 근대화 선봉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중국 설립 후 중국 경제발전에서 소외돼 장기간 침체돼 있었다. 개혁개방 이후 베이징·상하이·선전 등 경쟁도시가 빠르게 성장할 때에도 톈진은 여전히 직할시에 걸 맞는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다.
톈진시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후진타오·원자바오 4세대 지도부 출범 이후다. 특히 2006년 톈진 빈하이(濱海)신구가 제11차 5개년 계획 국가발전전략에 포함되며 중국 경제 발전의 새로운 성장 축으로 부상했다. 개혁·개방 1세대인 덩샤오핑이 선전을 만들고, 장쩌민이 상하이 푸둥지구 건설을 지휘했다면, 톈진 빈하이신구는 후진타오과 원자바오 총리가 만들어 낸 작품인 셈이다.
첨단제조업·첨단기술산업·화공·항만물류·우주항공·레저휴양·비즈니스센터지구 등 8개 지구로 나뉘어 개발되고 있는 빈하이신구는 복합신도시 형태를 띠고 있다. 총면적 2270㎢, 인구 263만명의 빈하이신구 GDP는 지난 해 8020억 위안에 달해 2009년(3810억 위안)의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 1인당GDP는 무려 5만 달러에 달한다. 삼성전자, 도요타, 모토로라, 에어버스 등 글로벌 500대 기업 중 150여곳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는 모두 중국 당국의 세수 우대, 행정 간소화, 투자유치 등과 같은 적극적인 정책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북한 개혁개방의 모델로 참고하기 위해 지난 2004년에 이어 2010년 방중 때도 이곳을 방문해 시찰했다.
빈하이신구 발전에 힘입어 톈진시는 금융위기 발발 이후 여타 연해도시가 경제 침체로 허덕이고 있을 때에도 꾸준히 두자릿수 성장률을 구가해하며 지난 2011년 처음으로 GDP 1조 위안을 돌파했다. 지난해 12.5% 성장률을 기록하며 중국 31개 성시 중 1위를 기록했다. 톈진시 1인당 GDP는 지난해 1만5383달러로 이미 2011년 베이징·상하이를 추월해 중국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다. 올해 초 베이징·톈진·허베이성을 하나로 묶는 수도권 개발계획 ‘징진지(京津翼) 개발 계획’이 발표되면서 톈진은 또 한 차례 비상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