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를 읽다(20)] 천하의 중심을 꿈꾼 수도 베이징의 어제와 오늘 (上)

2014-09-03 07:00

 

[사진=중국신문사]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제2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오는 11월 10~11일 중국 베이징(北京) 화이러우(懷柔)구 옌치후(雁栖湖)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확정됐다. 중국이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한 것은 지난 2001년 상하이 APEC 정상회의 이후 13년 만이다. 중국은 APEC을 수도 베이징에서 개최함으로써 세계 G2 수도로서의 면모를 전 세계 과시한다는 계획이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한자 그대로 '북쪽의 수도' 라는 뜻이다. 화베이 평야 북쪽 끝에 위치한 베이징은 연(燕) 나라를 시작으로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지정된 유서 깊은 정치, 문화의 도시이다.  시안(西安), 난징(南京), 뤄양(洛陽)과 함께 중국 4대 고도(古都)로 불린다.

사실 처음부터 베이징이라 불린 것은 아니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베이징 이름도 수 차례 바뀌었다.

베이징은 2300여년 전 춘추전국시대에 연 나라 도읍 ‘연경(燕京)’으로 처음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이후 10세기 초 거란족의 요 나라가 베이징에 배도를 설치하고 ‘남경(南京)’이라고 불렀다. 12세기 중엽에는 여진족의 금 나라가 요 나라로부터 베이징을 빼앗고 이곳을 수도로 삼고 ‘중도(中都)’라 불렀다. 이어 전 중국을 통일한 몽고 쿠빌라이 칸(원 세조)은 베이징을 새 수도로 삼고 ‘대도(大都)’라 불렀다. 과거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 속에 중국도 바로 원나라 때 당시 베이징의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을 소개한 것이다.

이후 명 나라를 세운 주원장(명 태조)은 수도를 지금의 난징으로 옮겼으며, 원나라를 함락시킨 후 북쪽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베이징을 ‘북평(北平)’이라 부르며 폄하했다. 하지만 명 나라 영락제가 다시 수도를 난징에서 북평으로 옮긴 후 북쪽의 수도라는 뜻으로 베이징(北京 북경)이라 지었다. 이후 베이징은 명·청 왕조 수도로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 수도 베이징 중심에 위치한 자금성도 바로 영락제가 수도를 옮기며 건설한 것이다. 자금성은 1911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물러나기까지 모두 24명의 명·청 황제가 머물렀다.

근대화 시기 수도 베이징은 파란만장한 시기를 거쳤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에 의해 여름황궁인 원명원이 약탈되고 방화되는 등 수도 베이징은 열강에 유린당했다. 이어 1912년 신해혁명으로 쑨원이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난징에 설립했으며, 이어 1928년 장제스는 난징을 수도로 국민당 정부를 세웠다. 이 당시 베이징은 구경(舊京 옛 수도), 라오(老)베이징으로 불렸다. 베이징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 다시 수도의 지위를 되찾았다.

중화(中華)라고 하는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가진 중국 역사 속에서 베이징은 자연스럽게 '천하의 수도'로 여겨졌다. 베이징은 중국 도시의 이상적 모델인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입각해 건설됐다. 실용적인 목적보다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 사상이 우선시됐다. 베이징 건축배치는 중앙궁궐, 좌묘우사(左廟右社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 전조후시(前朝後市 궁궐의 앞은 관아, 뒤는 시장) 등 철저한 원칙에 따라 계획적으로 설계됐다. 종축선을 중심으로 한 좌우대칭과 도로, 구획 설정은 당시 중국인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수도의 모습이다.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담아내고자 베이징에는 없던 산과 호수도 인공적으로 만들어냈다. 징산(景山)공원, 스차하이 (什刹海), 이화원(頤和園) 등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특히 자금성은 바로 황제로 대표되는 천하제일 권력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다. 자금성이란 뜻도 중국의 황제, 즉 천자가 사는 궁궐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성이라는 의미다. 성(內城), 외성(外城)등 여러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성벽 높이가 무려 10m로 성 둘레에 폭 50m 도량 해자까지 흘러 일반 서민들이 사는 생활공간과는 격리됐다.

중국 역사학자 이중톈은 저서 ‘독성기(讀城記)’에서 베이징의 도시 성격을 ‘성(城)’으로 규정했다. 겹겹이 둘러쳐진 성벽과 톈안먼(天安門) 등 수많은 문이 있다는 점이 정치, 군사의 중심지임을 상징함과 동시에 관료사회 계급 편차가 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 이에 베이징 사람들이 자부심이 강하고 위풍당당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