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를 읽다(19)] 한국인이 만든 도시 '웨이하이'

2014-08-20 07:00

[사진=중국신문사]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중국이 역사적으로 치욕적으로 여기는 청일전쟁(중국명 갑오전쟁) 120주년을 맞은 지난 7월 25일. 과거 북양함대 기지였던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 류궁다오(劉公島)에서 중국 해군은 ‘갑오의 치욕을 가슴 속에 새기고, 강군의 꿈을 실천하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기념식을 가졌다. 120년 전 웨이하이 류궁다오 앞바다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마지막까지 싸운 북양해군은 결국 5000여명 이상이 전사해 청나라 군대는 전멸했다. 중국은 당시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웨이하이에 갑오전쟁 박물관, 북양함대 마지막 제독 정여창 기념관 등을 세웠고,  웨이하이는 중국인의 애국주의 고양기지, 역사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웨이하이라는 명칭도 명나라 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위소(衛所)가 설치되면서 붙여진 것이다.

중국 근대사의 상처를 가진 웨이하이는 사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인구 20만명에 불과한 황량한 어촌이었다. 개혁개방 초기 웨이하이시 지역 GDP는 10억 위안도 채 되지 않았다. 웨이하이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와서부터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는 웨이하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웨이하이(威海)에서 닭이 울면 인천에서 들린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웨이하이는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중국의 도시다. 덕분에 웨이하이는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2년 전인 1990년에 이미 인천과 바닷길을 열었다. 한국과 중국을 잇는 최초의 국제 여객선 항로였다. 9월 개막하는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성공 기원 봉화는 중국 웨이하이에서 이 뱃길을 통해 인천으로 건너왔다.

1990년대 한국과 경제교역에 물꼬를 튼 웨이하이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92년 당시 127억4200위안에 불과하던 지역 GDP는 1997년 423억6300만 위안에서 2002년 676억4900만 위안, 2013년 2549억6900만 위안으로까지 늘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웨이하이시 전체 대외교역액 171억5000만 달러에서 한국과의 교역액이 52억2600만 달러로 전체 30.5% 점유했다. 유럽(12.2%), 일본(11.1%)간 교역액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웨이하이시 세수의 절반 이상은 한국 기업에서 나오고 있다. 웨이하이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인천시 웨이하이구’, ’한국인이 만든 도시’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한국이 웨이하이시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웨이하이는 현재 한·중간 경제교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사실 웨이하이와 한국과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천여년 전인 고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일 신라 때 해상왕 장보고는 웨이하이로 건너가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당시 웨이하이엔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이 존재했고, 장보고가 세운 적산 법화원도 있었다. 오늘날 웨이하이엔 삼성전자·삼성중공업·현대중공업·롯데백화점·우리은행·금호아시아나 등 600여개의 한국 기업과 1만5000여명의 교민이 생활하며 '신(新) 신라방'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엔 한국과 중국간 해저터널을 웨이하이에 건설하자는 이야기도 오고 가고 있다.

웨이하이의 경제적 중요성도 나날이 부각되고 있다. 웨이하이는 현재 인근 칭다오·옌타이 등 산둥성 해안도시와 함께 블루경제(해양경제) 구역으로 지정돼 향후 발전이 전도유망하다. 여기에 웨이하이시는 첨단산업단지인 난하이(南海)신구를 건설해 한국과 중국간 자유무역협정(FTA)체결에 대비하고 더 많은 외국기업을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이밖에 웨이하이는 중국 내 관광인프라를 갖춘 휴양레저 도시로도 각광받고 있다. 웨이하이는 유엔이 선정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청정도시로 유명하다. 기후가 온화하고 비가 내리는 날이 적어 사계절 내내 골프를 즐기는 골퍼들의 천국이다. 이곳엔 금호아시아나가 운영하는 웨이하이포인트를 비롯해 유명 골프장이 곳곳에 소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