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 박근혜대통령 만나고 세월호 참사가족도 직접 만난다
2014-08-13 13:29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 "교종께서 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 한반도를 제일 먼저 찾아주시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려는 염원 때문이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멀리서 오는 귀한 손님을 한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해 주시기를 청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
14일 방한하는 '가난한 자의 벗' 프란치스코 교황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려있다. 특정 종교의 지도자를 향한 눈길이 아니다. 교황과 그의 이번 방한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는 "교종(교황)께서 많은 번민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의 복음을 들려줄 것으로 생각한다"며 "특정 사안에 대한 구체적 답변까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문제에 관해 폭넓은 조언을 주실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방한 일정도 아시아 가톨릭청년대회와 천주교 순교자 시복식 집전, 한국과 아시아 주교단과의 만남, 가톨릭 복지시설인 음성 꽃동네 방문 등 대부분 종교 행사로 짜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마지막 날인 18일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며 한국에서 마지막 강론을 한다. 미사에서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한국과 동아시아를 위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14일 오전 10시30분 서울공항에 도착한 뒤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리는 공식 환영식에 참석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면담한다. 박 대통령은 직접 공항에 나가 교황을 영접할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은 청와대에서 주요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연설하고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한국천주교 주교단을 만나는 것으로 방한 첫날 일정을 마무리한다.
이후 교황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용산참사 피해자, 밀양·강정 마을 주민 등을 미사를 통해 만나며,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은 직접 만날 예정이다.
교황은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직후에는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면서 "한국민들이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윤리적,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바란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세상 속의 교회', '양떼 속의 목자'를 강조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와 다양한 사회 갈등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도 언급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15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는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과 유족들이 참석한다. 교황은 이들을 직접 만나 위로할 예정이다. 교황이 집전하는 16일 광화문 시복식 미사는 현재 광장에서 농성하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않게 진행할 예정이다.
■한국은 '순교자의 땅' 위상..교황 광화문서 '124위 시복식'주재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 오는 두 번째 교황이다. 이전 265명의 교황 가운데 한국을 찾은 유일한 교황은 요한 바오로 2세였다.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 방한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5월 3일 낮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비행기 트랩 아래 엎드려 땅바닥에 입을 맞추던 장면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는 "순교자의 땅"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한국 땅에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했다.
세계 가톨릭에서 한국천주교의 역사는 독특한 위상을 갖는다.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한국천주교의 특징은 두 가지다.
외부 선교사의 전교 없이 교리를 공부해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교회를 세운 것과 오랜 박해로 수많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이 중국에서 들어온 뒤 18세기 후반, 천주교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된건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은 권철신(1736∼1801),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1758∼1816), 이벽(1754∼1786) 같은 지식인들이 서울 부근의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유교경전을 공부하면서다.
1784년 교회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돼 신자 수는 1000명을 헤아리게 됐다.1800년 무렵에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집권층은 천주교를 반왕조적 종교로 규정하고 탄압을 단행한다.
한국천주교에 기록된 큰 박해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이다. 신유박해는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초기 교회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이후 신자들은 교회 재건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교회 재건에 나선 대표적 신자로는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1795∼1839)이 있었고, 배교를 하고 귀양을 살던 정약용도 재건 운동에 참여했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됨으로써 한국 천주교는 베이징교구의 관할에서 벗어나 독자적 발전의 길을 걷게 됐다. 하지만 1860년대 초 거듭된 박해에도 천주교의 발전이 계속되자 흥선대원군은 다시 탄압에 나섰다. 박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9명이 순교하자 프랑스 해군은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1868년에는 대원군의 생부인 남연군 묘 파묘사건도 발생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천주교 탄압은 더욱 혹독해져 충청도 해미에서는 많은 신자가 생매장됐다.
'피로 지킨 신앙' 박해의 세월이 간직된 곳이 한국 천주교 최대 순교성지인 서소문 순교성지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중 27위가 순교한 장소다. 교황은 16일 서소문 순교성지를 참배한 뒤 바로 윤치충 바오로 등 124위의 시복식(순교한 천주교 신자를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로 선포하는 일) 장소인 광화문에서 직접 시복미사를 주례한다. 교황이 내한 집전하는 '124위 순교자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 시복식이다. 첫 시복식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79위), 두 번째 시복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24위), 두 번 다 로마에서 열렸다. 두 번에 걸쳐 복자품에 오른 103위 순교자들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한편, 교황은 방한 기간에 서울 종로의 주한교황청대사관에 머문다. 장거리 이동 때는 청와대에서 제공하는 전용헬기를, 단거리 이동은 승용차를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