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프론티어] "성범죄 피해자의 입을 막고 있지 않습니까?"

2011-02-28 15:48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인터뷰

(아주경제 변해정 기자) "우리 사회의 왜곡된 성(性)문화를 바꾸려는 노력 없이 성폭력 가해자 처벌만 강화하는 성폭력 대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사진)이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건넨 첫 마디다. 성범죄 근절을 위해서는 잘못된 성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라는 사법절차를 이용할 수 있지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질 지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피해사실을 밝힐 경우 겪게 될 고통과 부담감은 매우 크다"며 "승소가 보장되지 않는 한 '2차 피해'만 입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범죄 신고율이 10%에도 못 미치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성범죄 은폐 '여전'…가해자 중심 수사관행 없애야

2006년 동네 신발가게 주인에게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된 '용산 허양(당시 11세) 사건'과 2009년 성폭행 증거 인멸 시도로 피해자의 장기 일부가 영구 훼손된 '나영이(당시 8세) 사건'을 계기로 각종 성범죄 추방대책이 쏟아져 나왔다.

이 소장은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관련 법·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피해자의 인권 보호'라는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화학적 거세·전자발찌 부착 등 성범죄자를 가중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며 "피해자가 모든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데다 가해자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까지 절차가 복잡해 고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성폭력 사건 특성상 목격자가 드물로 85% 이상이 친인척·이웃·동급생 등 아는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측면에서 고소 과정에서 또 한번 울게되는 피해자가 많다는 설명이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성범죄 발생건수는 2005년 1만3446건에서 2009년 1만8351건으로 늘어난 반면 기소율은 72.7%에서 69.3%로 급감했다. 강간·성추행 피해 고소 비율(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사결과)도 6.1%에 불과하다.

그는 "가해자의 형량 못지않게 처벌의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며 "피해자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수사기관의 가해자 중심 수사관행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이 성범죄의 비친고죄 개정과 낙태여성 처벌금지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친고죄는 피해자 본인이 고소해야 수사가 시작되고, 합의만 하면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다. 합의를 종용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유출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며 "성폭력을 예방하고 수사과정에서 2차 피해를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친고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신중절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권은 여성 자신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범죄 피해자를 돕기 위해 정부에서 설립한 원스톱지원센터에서조차 임신 동기를 입증해야만 시술이 가능하다. 현행법으로 보장돼 있는 낙태 마저 거부당하고 민간병원을 찾아다녀야 하는 실정"이라며 "낙태시술 단속 강화 조치는 법적으로 보장된 성범죄 피해자의 권리마저 박탈한 처사"라고 질타했다

이 소장은 무엇보다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회적 공감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대안으로 '1인1시민단체 기부 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써달라며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쾌척하는 회원이 현재 1000명 정도"라며 "언뜻 많아보이지만 상담소가 개소된 이후 20년간 확보한 회원수 치곤 매우 적다"고 지적했다. 국민 소수가 낸 성금과 정부 지원금만으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데 한계가 있음을 우회적으로 토로했다.

국내 기부문화의 중심이 '개인'보다는 '기업'에 치중돼 있는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듯 했다.

이 소장은 '1인1시민단체 기부 운동'이 재정이 열악한 비정부기구(NGO)의 운영을 돕고, 더 나아가 기부문화 확산을 통한 성숙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최근 '1인1사 채용캠페인'과 같이 자발적으로 일자리 창출 참여를 유도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며 "NGO가 탄탄해져야 성숙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만큼 '1인1시민단체 기부 운동'을 정착시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말단 직원에서 소장까지…"소통에서 답 찾아"

이 소장이 여성운동가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우연이였다. 1991년 대학교 재학시절 '여성학' 교양 수업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여성단체의 일을 돕게 된 것.

2006년 임원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을 진두지휘 했고, 2009년부터는 상담소장으로서 여성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소장은 "자원봉사자 일원으로 처음 합류했을 당시에는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여서 복사·전화상담 등의 업무를 도맡아 했었다"고 회고했다.

20여년간 수많은 성범죄 문제를 상담·해결해 온 그에게도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 바로 1993년에 일어난 '서울대 조교사건'이다. 이는 성희롱이 법정 분쟁으로 비화된 최초의 사건으로, 이후 성희롱 가해자 징계를 의무화한 '남녀고용평등법'과 사업체에 성희롱 방지 의무교육을 규정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개정됐다.

그는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의미는 매우 크다"며 "개인적으로도 6년간의 법정투쟁을 이겨 낸 우 조교의 용기와 인내심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올해 개소 20주년을 맞아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상담·지원 노하우를 담은 책자를 출판한다. 이 소장이 어느 해보다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유다. 그는 책자 발간과정에 직접 참여, 목차·내용·제본 등의 업무를 일일이 챙기고 있다.

오는 4월에는 여성 현안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 온 국내외 여성전문가를 초청해 자축 행사도 열 예정이다.

이 소장은 "올해가 성폭력을 조장하는 사회 풍토를 바꾸고 여성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원년이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성별과 세대를 초월한 폭넓은 소통으로 여성 문제를 적극 해결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