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核가시 세운 北 '고슴도치' 전략에 대화 한 번 안 한 대통령 될 것인가

2024-10-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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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이재호 논설고문]



북한이 15일 경의‧동해선을 폭파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작년 12월 “남북이 ‘두 국가’로 제각기 살아가자”고 한 이래 나온 가장 강력한 관계 단절 메시지다. 남북 간 유일한 연결 통로인 두 도로마저 폭파함으로써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북은 한국을 ‘헌법상 최적대국’으로 규정하고 “주권 침해를 당하면 거침없이 물리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동맹인 러시아를 돕기 위해 특수부대 1만2000여 명을 우크라이나전쟁에 파병한다. 북은 왜 이럴까. 우리의 대응은 적절한가. 한·미 동맹은 여일한가. 한반도에 신냉전의 기류가 엄습하고 있다.
 
김정은이 통일을 포기하고 남북한 ‘두 국가론’을 들고 나온 이유는 누구든 짐작할 수 있다. 남북 간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어서 이대로 가면 적화통일은커녕 남한에 흡수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3대 혁명역량론의 쇠퇴를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지적하고 싶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 이래 지금껏 체제유지의 축(軸)으로 기능해온 3대 혁명론이 더는 통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북은 좌절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좌절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문(門)을 꼭꼭 닫아 걸게 하고, 스스로 통일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으며,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도록 했다. 실로 놀라운 변화다. 남북한 격차가 ‘총론’이라면 3대 혁명론은 일종의 ‘각론’이라고 할 수 있다.
 
3대 혁명역량론은 △혁명의 기지로서 북한 자체의 혁명역량 강화 △남한 내부의 혁명역량 강화 △국제적 지원 강화, 이 셋으로 구성된다. 말은 길지만 내용은 단순 명료하다. 세계 각국에 혁명을 수출하는 기지로서 북의 혁명역량이 먼저 강화되어야 하고, 둘째로 혁명을 수출할(혁명을 받아들일) 대상 국가(남한)의 혁명인프라가 갖춰져야 하며, 마지막으로 혁명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국제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대 혁명역량이 위력을 발휘했던 게 1950년 한국전쟁이다. 이들 세 요소가 완전히 맞아떨어져 스탈린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한때 한국 점령 직전까지 갔다가 유엔군의 개입으로 패퇴했다,

그러나 이제 3대 혁명역량론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 철 지난 프레임에 불과하다. 세계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다. 북의 형편이 너무 어려운 데 반해 남한은 자유와 시장경제, 그리고 문화의 활력이 넘쳐 언제든 북을 향해 밀고 올라갈 기세다. K-컬처에 맞설 장사는 없어 보인다. 국제사회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원은커녕 핵 개발로 제재를 받고 있다. 북이 요즘 러시아와 부쩍 가까워졌다지만 러시아에 이용만 당하는 건 아닐까.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북의 핵 놀음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김정은이 혹여 줄을 잘못 선 것은 아닐까.
 
통계청이 밝힌 2023년 북한의 통계지표에 따르면 북한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36조2000억 원으로 한국(2161조8000억원) 대비 1.7%(60분의 1) 수준이다. 1인당 GNI는 143만원으로 한국의 4249만원과 비교가 안 된다. 이 밖에 인구(북 2570만명, 한국 5000만명), 기대수명, 식량생산량, 발전량, 하루 섭취 에너지, 작물 등 모든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주목할 대상은 북한판 MZ세대다. 그들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의 세대, 곧 장마당 세대로 국가 기능의 붕괴를 경험했고, 작지만 시장경제를 경험한 세대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은 그 수를 800만명 정도로 보고 있다. 북한 인구를 2500만명으로 봤을 때 32%가 MZ세대인 셈이다. 이들은 알게 모르게 시장(市場)을 통해서 북한 체제의 변화를 추동해 왔다. 시장화로 이제껏 유지되던 가부장제를 통한 배급제도가 약화되면서 출산과 육아가 더욱더 개인의 선택으로 바뀌는 등 그 파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통일부)
 
지난해 채택된 평양문화어보호법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에게는 ‘오빠야’ ‘자기야’ 등과 같은 남한 말을 못 쓰게 하는 법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어기면 처벌된다. 이 법 18조는 ‘국가적으로 지정된 괴뢰말투 제거용 프로그램을 손전화기(휴대폰), 컴퓨터, 봉사기에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손전화기와 컴퓨터 사용에 관심을 갖고 ’잡 사상‘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남측 영상물 유포자는 사형에 처해진다. 체제 유지를 위한 북한 정권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김정은은 통일 포기로 천하에 없는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통일, 곧 적화통일은 할아버지 김일성, 아버지 김정일의 평생에 걸친 목표였다. 그걸 부정하고 두 국가론을 들고 나왔으니 지하의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북한 정치에서 효(孝)는 지배 이데올로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도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이 2001년 평양에 세운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까지 철거해 버렸다. “공화국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면서 철거를 지시했다고 한다.
 
생전의 김일성은 1948년 제1차 헌법제정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이라고 했을 만큼 통일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같은 해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면서도 212명을 남한 출신으로 뽑을 정도였다. 그런 유산을 손자가 이어받기는커녕 훼손한 셈이다.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가요가 생각난다. 임종석 전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도 김정은의 통일 포기와 ‘두 국가론’에 공개적으로 찬성했다. 김정은이 어려울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편이 돼준 셈이다. 그러나 지금 통일을 부인하고 두 국가론에 동조했다가 언제든 실제로 통일이 되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자칫 북녘 땅을 잃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한 마리의 ‘고슴도치(hedgehog)'를 키워야 할지 모른다. 평소엔 잔뜩 움츠리고 있지만 가시 같은 날카로운 털로 덮여 있어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고슴도치 말이다. 국제정치학계에 ‘고슴도치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이상우(李相禹) 전 한림대 총장이다. 그는 1970년대 말 한국의 대외정책이나 행태는 고슴도치를 닮아야 한다고 했다. 약소국이지만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 곧 상대가 두려워할 뭔가를 가진 그런 국가라야 한다는 것. 그래야 다른 국가에 무시당하지 않고 할 말은 하며, 국익을 지키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김정은은 ‘고슴도치형 북조선’을 지향할 게 분명하다. 북한의 고슴도치의 가시가 어디 보통 가시인가. 핵(核)으로 벼려낸 가시다. 누구든 그 앞에서 조심하지 않을 수 없을 터. 김정은은 핵은 물론 이런 점까지 염두에 두고 통일도, 남한과 관계 개선도 포기한다고 했을 것이다. 폭파한 경의‧동해선 자리에 쌓아올릴 거라는 장벽 뒤에서 그가 할 일은 뻔하다. 핵은 이미 가졌으니 그에 더해 남한 전역을 때릴 수 있는 초대형 방사포, 신형 전차, 북한판 스트라이커 장갑차 등 신형 재래식 무기 개발에 열을 올릴 것이다. 북은 전통적으로 뭘 잘 만든다. 탱크도 우리보다 먼저 만들었다.
 
문제는 이제 북을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내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고슴도치처럼 움츠리고 있는 북을 무슨 수로 불러낼 것인가. 평소 대화라도 했던 사이라면 또 몰라도 대화는커녕 서로 날만 세웠던 사이니 쉽지가 않을 것이다. 북으로서도 남한을 ‘헌법상 최적대국’으로 규정했는데 갑자기 대화 운운하기도 쉽지는 않을 터. 자칫하면 ‘대화 공백’이 아주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그 부담은 오롯이 윤석열 정권에 돌아올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북한보다도 우리 사회 내 좌파들의 공격을 견뎌내기가 더 힘들지도 모른다. 벌써 그들이 후렴구처럼 쓰는 상투어가 들리는 듯하다. “평화, 싫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 내가 언제 전쟁하자고 했나. 위선과 거짓투성이인 평화론은 제발 그만두라고 했지.

남북 대화를 시도한다면 내 생각엔 윤 정부가 효력을 정지시킨 9‧19군사합의를 다시 살려내는 대화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마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는 11월 미국 대선 결과도 봐야 하지만 그전에 우리 측이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것도 방법이 아닌가 싶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 9일 싱가포르를 방문한 자리에서 자신의 8‧15 통일독트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자유 통일 한반도가 실현되면 한반도는 물론 인도‧태평양 지역과 국제사회의 평화가 획기적으로 진전될 수 있다. ···북한의 핵위협이 사라지고 국제 비확산체제가 공고해지면서 역내 국가 간, 지역 간 평화와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대폭 활성화될 것이다.” 바른 방향이고, 아름다운 비전이며, 따뜻한 격려였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일어나려면 우선 북과 대화부터 해야 한다. 북을 대화의 테이블로 나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임기의 반환점을 눈앞에 둔 윤 대통령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5년 임기 내내 남북 대화 한 번 안 해본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가.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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