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현재와 미래 세력 간의 경쟁이다. 현재의 권력은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쳐야하므로 그 시선이 오늘에 가 있지만, 미래의 권력은 그 지향점이 내일을 향해 있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만 한국은 정권 교체의 사이클(5년 단임제)이 짧아 그 과정이 더 ‘역동적’이다. 때로는 갈등을 빚기도 한다. 여야 의정협의체 구성문제를 놓고 맞선 형국인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갈등과 불화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윤 대통령은 19일 체코 방문을 마친 후 24일 한 대표를 비롯한 여당지도부를 용산 대통령실로 초청해 만찬을 갖는다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이 자리에선 추석 민심을 점검하고, 의료개혁을 비롯한 개혁과제와 민생현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과 한 대표의 공식적인 만남은 지난 7월 30일 대통령실에서의 비공개 면담 이후 처음으로 알려졌다. 원래 두 사람은 8월 30일 만찬을 갖기로 했다가 추석 연휴 이후로 미루었다. 당시 대통령실은 “추석 민생이 우선”이라고 연기 이유를 밝혔지만, 그보다는 한 대표가 대통령의 뜻과는 다른 의료개혁 중재안을 내놓은 데 대한 불편한 기류 탓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韓, 내가 모르는 내용이라서…
한 대표는 20일 보도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련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가감 없이 밝혔다(8일 대통령 만찬에 초대 못 받은 것에 대해). "밥을 누구랑 먹는 게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실 생각이 민심과 동떨어져있는데, 불편해지는 게 싫다고 편을 들어야 하나?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 의료개혁만 해도 많은 국민이 불안을 느낀다면 정치는 뭐라도 해야 한다. 여야정 협의체는 될 때까지 설득하겠다. 의사 증원과 필수 의료 개선 등 개혁에는 찬성하나 증원 규모와 방식에 정답이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적 현안을 놓고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분명하게 자신의 소신을 편 사람은 흔치 않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관련’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대통령과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가 됐다고 한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 건널 수 없는 강은 없다. 분명한 건, 부적절한 처신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거다. 예전에 대통령님과 같이 일할 때도 언쟁 많이 했다. 순간의 유불리를 위해 가방을 받는 건 괜찮다고 말하지 않겠다.” 체코 행 비행기 안에서 이 기사를 봤거나, 보고를 받았을 윤 대통령의 표정이 어땠을까.
“국민이 불안 느끼면 뭐라도 해야”
사실 우리 정치에서 당 대표라는 자리는 매우 미묘한 자리다. 권한과 책임이 막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당 대표 제도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때 생겼다, 그 전에는 대통령이 당 총재(대표)를 겸직하다가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분리됐다. 지금은 각 당이 당헌에 대통령의 당직 겸임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는 공천 등 당무에 대한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 행사를 막기 위해서다. 우리처럼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선 당 대표가 없다. 경선관리를 하는 전국위원회와 위원장만 두고 있다. 대통령에 대해선 상, 하원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찬, 반 의견을 내고 맞설 뿐이다.
당 대표는 법적으로 당원의 대표(실제 전 당원투표로 선출)이므로 정책이나 의견표명이 대통령과 꼭 같아야 할 필요도 없다. 당원들의 대표이므로 행정기관이나 집행기구도 아니다. 다만 정치적인 면에서 민심을 파악하고 전달할 수 있는 의사 전달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행정부의 정책 수립 전에 민심을 전달하고 협의, 조율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과정 없이 사안을 당에 떠넘기거나 밀어붙인다면 언제든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윤과 한의 관계를 얘기할 때는 누구든 과거 검찰에서의 관계부터 떠올리게 된다. 서울법대 선후배이자 특수통 검사로서 두 사람은 평소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윤이 검찰총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자 한 대표는 법무부장관을 거쳐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후 ‘김경율 사천 논란’ 등으로 소원해지는 것처럼 비쳤지만 지난 1월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조우함으로써 유대를 과시했다.
추운 날씨에도 현장에 먼저 나와 대통령을 기다리던 한 위원장과, 그로부터 90도 폴더 인사를 받고 그의 어깨를 툭툭 치던 대통령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호전’되는 듯 했으나 8개월여 만에 여야 의정협의체 문제 등을 놓고 다시 갈등 중이다.
“여야 의정협의체 현실성 없다”
대통령실의 입장은 분명하다. 한 대표의 의대 정원 유예안은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건 대안이라기보다는 의사 증원을 하지 말자는 얘기와 같다는 것. 한 관계자는 “정부와 의료계가 강 대 강 대치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해집단의 구조적인 저항에 굴복한다면 정책을 펴기 어렵고 정상적인 나라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양측의 주장이 이처럼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서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사안의 본질은 제쳐두고 끝없이 정치화되기 때문이다. 정치화되면 될수록 해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 전에 차단해야 하나 불행히도 그 단계는 이미 지난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재명 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에서 한 대표의 안을 “의료붕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불가피한 대안 중의 하나”라고 치켜세우고 정부에 언필칭 “심도 있는 고민”을 당부했을 때 이미 감지됐던 불길함이다.
탄핵국회, 특검국회 대신 민생국회를
민심은 어디에 있나. 도대체 민심은 무언가. 누구를 지지하거나 두둔해서가 아니다. 총선 참패로 최소한의 균형마저 깨져 국회는 사실상 탄핵국회, 특검국회로 전락한 현실 앞에서 의사 수 늘리는 문제로 갈라지고 찢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답답함이다. 국민이 많은 걸 바라는 것도, 무슨 거창한 논의를 해달라는 것도 아닐 것이다. 최소한의 균형을 이룬 국회, 탄핵보다, 특검보다 민생을 놓고 머리를 맞댈 국회를 보고 싶다는 게 국민의 마음일 터다.
윤 대통령부터 인식을 바꿔야 한다. 한 대표와의 검찰 때의 위계(位階) 관계에 관한 추억과 결별해야 한다. 한때 수직적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가 수평적 쌍방향 관계로 이미 바뀌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있다고 할 만큼 전환기적 시대”라고 했다. 그에 맞는 인식과 행태,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黨의 원로들은 구경만 하고 있나
당의 원로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한때 날렸던 다선의 중진들이 앞장서서 설득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바뀔 것이다. 의정단상을 누볐던 다선의 상임고문단이 있지만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당의 단합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고 싶어도 기회를 안 줘서 못하는 원로 의원들이 많다.
정부 여당 사람들이 민주당을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지적하는 게 일사불란과 상명하복이다. 당에서 지시하면 그대로 따라가고 다른 의견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거다. 올해 들어 민주당은 국회의장을 비롯한 주요 선거에서 확실하게 일사불란함을 보여줬다. 선거에 나온 모든 후보들도 하나같이 이재명 대표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이른바 ‘명심(明心) 팔이’다. 저쪽의 ‘명심팔이’는 비판하면서 자신들은 원내외의 작은 다양성 하나도 소화를 못한다면 모순이다.
“韓, 정치적 희망 가지려면 윤과 멀어져야”
아주 현실적인 정치 얘기를 하자. 대통령학 전공자인 함성득 교수(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는 오래전부터 말했다. 한국 정치에서의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그 정권이 얼마나 잘했느냐 여부보다는 자신에게 얼마나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되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우리 현실에선 후임 정권과 다투지만 않아도 고마울 터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김종인 전 개혁신당 상임고문은 지난 4월 23일 SBS 유튜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정치적으로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려면 윤석열 대통령과 멀어지는 게 좋고, 본인을 윤 대통령과 일치시키면 전혀 희망이 없다.” 윤과 한, 두 사람은 최근 지지율 조사에서 동반 하락했다.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