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파리 올림픽 하면 ‘해병대 훈련’부터 먼저 떠오른다. 선수들의 선전으로 연일 메달이 쏟아지자 이기홍 대한체육회장은 “올림픽을 앞두고 실시한 해병대 훈련으로 ‘원팀 코리아’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라고 했다. 작년 12월 선수와 임원 400여 명을 경북 포항 해병대 캠프에 모아 놓고 2박 3일간 실시한 극기 훈련이 주효했다는 거다.
‘해병대 훈련’의 대척점에 배드민턴 여자 단식 우승자인 안세영(22‧삼성생명)이 있다. 부상투혼으로 국민을 감동케 한 그는 우승 후 인터뷰에서 그동안 힘들었던 과정을 털어놓았다.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배드민턴협회가 그에 합당한 케어(보호관리)를 해주지 않았다”는 거고, “이런 상태라면 대표 팀과 같이 가기 힘들 것 같다”는 가히 폭탄선언이었다.
‘해병대 캠프 훈련’의 기적?
배드민턴협회는 즉각 반박했다. 나름대로 최선의 지원을 했다는 거다. 대선배인 방수현(52‧MBC 해설위원‧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단식 우승)도 나섰다. “협회에선 사상 처음으로 안세영에게 개인 트레이너를 붙여줄 정도로 배려를 했다”면서 “모든 선수들이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뛴다, 나도 어린 나이에 대표팀에 들어가 그 시간을 다 겪었다, 누가 등을 떠 밀어서 대표팀에 들어 간 게 아니지 않으냐”는 것.
짐작했겠지만 여론은 두 갈래로 나뉘는 듯하다. 앞서 말한 ‘해병대 캠프’ 세대, 이른바 ‘꼰대’의 눈으로 보면 안세영의 대응은 조금 지나쳤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필자가 여론조사기관을 동원해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평소 친분이 있는 원로 체육계 인사들에게 물어보면 답은 대체로 같다. “협회에 서운한 게 있더라도 이런 식으로 터뜨리듯 대응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거다. 그러나 배드민턴 문제에 정통한 한 전문가의 생각은 달랐다.
김화성 전 동아일보 스포츠 담당 기자는 지난 10일 월간 신동아 8월호(온라인)에 기고한 글에서 안세영 사태의 원인은 배드민턴협회의 무관심과 무능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안세영이 작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부상한 이후 (협회가) 지속적으로 세밀하게 체크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의 주장이다. “안세영의 말은 간단하다. 제발 대표선수 관리와 협회 운영 좀 똑바로 하라는 거다. 협회의 구닥다리 ‘꼰대’ 시스템을 전면 개혁해 달라는 거다.”
이기홍 회장은 안세영이 배드민턴협회와 계약한 용품회사의 신발이 발에 안 맞아 불편하다고 했지만 “이용대(2008년 베이징 올림픽 혼합복식 우승)도 아직까지 그런 컴플레인(complain‧불평)은 없었다(안 했다)”고 했다고 한다. 안세영만 유독 유난을 떤다는 뉘앙스라는 것. 김화성은 방수현 해설위원의 ‘라떼···’ 발언과 비슷한 ‘꼰대 맥락’이라고 했다.
대통령실까지 나선 ‘안세영 사태’
문체부는 안세영 선수가 “배드민턴협회의 부상 선수 관리, 선수 육성 및 훈련 방식, 의사 결정 체계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며 사실관계를 파악해 적절한 개선 조치의 필요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 위로 대통령실도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하니, 애먼 사람들만 곤욕을 치르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대통령실까지 나설 일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체육회에 맡기면 될 일 아닌가. 어떻든 이번 사태로 선수들이 위축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근까지도 선수들이 이런 일로 협회의 결정에 드러내놓고 반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안세영 사태’를 한국 스포츠 문화와 관리체계의 한 ‘변곡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바뀌고 있다거나, 우리도 마침내 스포츠를 자아실현(自我實現)의 한 수단으로 보게 됐다는 분석들이 그런 예다. 이런 인식은 앞에서 언급한 ‘해병대 캠프론’과 충돌한다.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꼰대’ 세대와 MZ 세대의 충돌인 셈이다.
안세영 측은 향후 국가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의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이 또한 협회의 도움(승인) 없이는 어렵기 때문이다. 안세영 측은 관련 규정을 개정하기 위해 법적 투쟁도 불사할 거라고 한다. 그는 이달 중 열리는 일본 오픈과 코리아 오픈에 불참한다. 부상 때문이라고 하지만 협회와의 불화 등 이런저런 사유들이 겹쳤을 게다. 선수나 협회, 그리고 체육회와 문체부부터 안세영도 살리고, 협회도 환골탈태하도록 해 양측이 윈윈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아주 멋진 말 ‘自我實現’
한국 스포츠도 전근대적인 국가주의와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개인의 발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스포츠 본연의 모습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꼰대’는 한 발 물러서고,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인 MZ세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승패에 연연하지 말고 즐기라”는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가.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또 어떻고.
필자는 기자 초년병 때 체육부에서 잠깐 근무했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하에서 프로야구가 잉태될 무렵이었다. 햇병아리 기자라서 소위 비인기 종목들을 10여 개 모아서 담당했는데 집안 형편이 극도로 어려웠던 어린 선수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바깥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어떤 종목의 누구라고 적시할 수는 없지만 이런 선수도 있었다. 추석날, 감독이 훈련을 중지하고 아이들을 모두 고향에 내려 보내는데 한 선수만 서울에 남아 계속 훈련하겠다고 했다. 청소년 대표급 기량을 가진 아이여서 감독이 더 기특하게 생각했는데, 귀성(歸省)을 안 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고향에 가봤자 누가 밥 한 끼 따뜻하게 차려줄 형편도 못 되고 굶주린 부모와 동생들 얼굴 보기도 미안해서 안 간 거였다. 그 아이는 추석날 자정이 훨씬 넘도록 텅 빈 체육관에서 혼자 연습했는데 아마도 울면서 공을 쳤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 다 잘생겼다”
‘라떼’ 얘기는 피하고 싶었는데 또 하게 됐다. 그동안 세상이 바뀌어 우리도 선진국이 됐고, 먹고사는 문제쯤은 해결됐다고들 한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이른바 귀족 스포츠라는 양궁, 펜싱, 사격에서 메달이 쏟아졌다. 공교롭게도 펜싱의 오상욱을 필두로 우리 선수들은 인물도 좋고 매너도 좋아 “한국 사람들은 다 잘생겼다.”는 말까지 들었다. 필자부터 ‘선진국’ 대접을 받는다는 게 것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동안 국제대회에만 나가면 남북 관계부터 질문해 기분을 잡치게 하던 서양 언론도 이제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럼에도 우리 선수들 절대 다수는 여전히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들다는 건 체육인 자신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가 밥술이나 먹게 됐다고 해서 ‘자아실현’ 운운하는 걸 선수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우리 선수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꼰대’ 세대의 피와 땀, 눈물 위에 오늘의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이 서 있다.
함께 가야 한다. ‘꼰대’의 헌신과 기여도 소중하고, ‘MZ’세대의 도전과 창조적 열정도 소중하다. 양측의 갈등이 폭로전 양상으로 흘러서야 되겠는가. 안세영 사태 이후 한국실업배드민턴연맹은 신인 선수의 연봉과 계약금 상한제를 완화하는 방안에 착수했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서로가 조금씩 물러서자. 올림픽사에 남을 만한 업적을 내고도 이게 무슨 꼴인가.
체육계에도 몰려드는 저출생 위기
'고장 나지 않은 것은 고치지 않는 게 좋다'는 보수주의자들의 금언은 맞다. 섣불리 선진국 흉내 낸다며 지금의 협회 체제를 해체하고 유럽 국가들처럼 클럽 체제로 가는 데 대해서도 신중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생활(대중)체육과 엘리트체육은 상보(相補) 관계다. 누구라도 그 보편성에 흠집을 내서는 안 된다. ‘자아실현’도 좋고 클럽 체제도 좋지만 나는 금메달이 더 좋다.
어쩌면 곧 체육계에도 덮쳐올 저출생의 위기부터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전통의 서울 K상고는 탁구팀을 재창설하기로 했다가 포기했다. 선수들을 공급해줄 중학교 팀을 찾지 못해서다. 종목을 막론하고 선수들이 없어서 팀을 못 만든다는 얘기들이 계속 쏟아질 판이다.
위기 앞에서는 선수든 협회든, 꼰대든 MZ든 손을 맞잡아야 한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쳐주자. 안세영도 열심히 했고, 배드민턴협회도 할 만큼 했다고. 더 큰 신화 창조를 위해 함께 나아가자고. 한 세대(30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해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기적도 서로가 맞잡은 바로 그 손으로 일궈낸 것 아닌가.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