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미국 대선을 보면 한편의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바이든과 트럼프의 '재대결'로 향하던 미국 대선이 바이든 대통령의 전격적인 후보 사퇴 이후 민주당 후보로 떠오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돌풍으로 대선판이 한 치 앞도 예상 못하는 안개 속으로 진입했다. 바이든의 사퇴는 고령 논란을 부각시킨 6월의 TV 토론 '참패' 이후 민주당 내 공개사퇴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 시점에서 지난달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 중 발생한 총격사건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미국 대선판은 바이든의 후보 사퇴와 해리스 부통령의 급부상으로 인해 이젠 원점으로 돌아간 형국이다. 59세로 나이가 트럼프보다 18살 적은 해리스는 인도계 흑인으로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겸 법무부장관 출신이다. 바이든 대통령에 비해 진보 색채의 인물로 알려진 그녀가 트럼프의 대항마로 부상한 이후 민주당뿐만 아니라 연예계, 청년층, 여성, 유색인종의 표심이 들썩이고 있다. 해리스 캠프에는 지난달 선거자금이 트럼프 전 대통령보다 세배 이상 몰렸다. 전국적 지지율도 트럼프와 엎치락 뒤치락 경쟁으로 트럼프 대세론은 한풀 기세가 꺾였다. 물론 해리스가 민주당의 새로운 주자가 결정되는 대형 정치적 이벤트 이후 나타나는 컨벤션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선거자금과 지지율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해리스의 돌풍은 예사롭지 않다.
해리스 부통령이 승리할 경우 그녀는 8년 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미국 우선주의'를 외친 트럼프에 막혀 이루지 못한 미국 첫 여성대통령 탄생의 역사를 쓰게 된다. 해리스가 여성이자 유색인종이라는 태생적 배경은 이번 선거에서 분명 경쟁력이자 한계로 작용할 전망이다. 2008년 첫 흑인 대통령(버락 오바마)을 배출했던 다원적이며 포용적인 미국 사회가 '흑인 여성' 대통령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됐느냐, 아니면 '트럼피즘'이라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이미 미국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음을 확인하느냐가 이번 선거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해리스 부통령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바짝 추격하거나 추월까지 하자 트럼프는 해리스에 대한 네거티브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백인 우월주의자'인 트럼프는 최근 "해리스는 내내 인도계 였으나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흑인이 됐다"고 말하는 등 인종주의적 발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또 해리스를 '급진 좌파'니 ' 마르크스주의 지방검사'라고 부르며 색깔론의 포문까지 열면서 선거판이 혼탁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당연히 공화당 내부에서도 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금 트럼프에겐 불필요한 인종차별성 발언이나 색깔론보다는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우려, 이민 문제 등 정책적 승부수로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유권자, 특히 주요 경합주의 부동층 표심을 잡기 위해선 네거티브 전략에만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1월 5일. 앞으로 석달도 남지 않은 미국 대선에서 해리스와 트럼프 누가 승리할지 예측하기는 변수가 너무 많다. 특히 가장 큰 분수령은 아직 일정이 확정되지 않은 트럼프와의 향후 TV토론의 평가일 것이다. 실제로 해리스는 지난 4년간 바이든 행정부에서 제대로 내세울 만한 부통령의 업적이 미약하다. 법조인 출신으로 바이든에 비해 외교 분야 경력이 많지 않다는 것도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바이든이 지난 대선에서 그녀를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것은 흑인·아시아계 등 유색인종 여성층의 지지를 받기 위한 전략이었다. 바이든의 후보 사퇴 이후 그녀가 당내 진보층의 결집을 다지는 데 성공하고 있지만 중도층 유권자에 대한 확장성은 아직 의문 부호로 남아있다. 그녀가 TV 토론에서 예상되는 트럼프의 저돌적인 공세를 적절하게 물리치며 '준비된 후보'로서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펼칠지, 또 복지나 환경, 낙태, 이민 문제 등에 대한 급진적인 색채에 대한 중도층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트럼프나 해리스 모두 향후 켐페인은 경합주에 포커스를 맞출 예정이다. 특히, 바이든 vs 트럼프 구도하에서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이내로 나타났던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 러스트벨트(rust belt· '세계화'와 '자유 무역'에 타격을 본 오대호 인근의 쇠락한 공업지대)의 표심 공략이 최대 관건일 것으로 보인다. 이 세곳은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지역이었지만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모두 승리를 거둔 이후 선거 때마다 최대 승부처가 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러스트벨트인 오하이오의 '흙수저' 출신 J.D.밴스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낙점했다. 지난 두번의 대선 때처럼 트럼프는 러스트벨트의 중산층 이하 백인 유권자들의 상실감을 집중 공략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해리스는 6일 친서민·노동자 정책을 중시하는 진보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60)를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네브래스카 농촌 출신으로 쾌활한 성격의 백인인 월즈 주지사는 민주당 텃밭인 미네소타에서 6선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2019년부터 재선 주지사로 재임 중이다. 민주당의 전통적 '친노조' 기조를 바탕으로 러스트 벨트 노동자에 다가선다는 전략이다. 다만 해리스가 핵심 경합주인 펜실베이니아주의 조시 셔피로 주지사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하지 않은 것을 두고 공화당은 안도하는 모습이다.
지난 대선을 기준으로 애리조나, 플로리다, 조지아, 미시간,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7개주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엇비슷해 7대 경합주로 불린다. 바이든은 애리조나, 조지아,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5개주에서 승리를 거두며 트럼프의 연임을 막았다.
미 주요 언론은 해리스 부통령이 다른 경합주들을 내주더라도 ‘러스트 벨트’ 3곳만 지키면 승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역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이 3곳 중 1곳을 뺏으면 역시 승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월즈 주지사가 있는 미네소타주는 위스콘신주와 붙어 있다. 밴스 상원의원 지역구인 오하이오주는 미시간주와 펜실베이니아주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 vs 해리스'의 대결 못지않게 '밴스 vs 월즈'의 승부도 불꽃이 튈 전망이다.
한 달 전만 해도 '바이든 vs 트럼프'라는 미국민 대다수가 원치 않던 선거구도가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바이든의 후보 사퇴는 여러가지 요인이 작용했다지만 용기있는 큰 정치인의 결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이든은 자신의 후보직 사퇴 결정이 세대교체를 통해 국민 통합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며 해리스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이후 민주당은 해리스를 중심으로 진영을 재정비하고 있다. 그동안 바이든의 ‘고령 리스크’를 집중 공격하던 공화당은 선거전략을 다시 고민할 때이다. 잘못하면 그 화살이 트럼프를 향할 수도 있다. 바이든을 염두에 두고 오랜 기간 대선을 준비한 트럼프 진영은 이젠 수세적 입장이다. 특히 검사 출신인 해리스는 물론 트럼프 저격수로 떠오르는 월즈 주지사까지 4개의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를 집중 겨냥할 태세이다. 미 연방 대법원은 지난 5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 추문 입막음 돈 지급' 사건에 대한 재판의 선고를 연기해 달라는 요청을 기각했다. 1심 선고가 예정대로 내달 18일 이뤄질 전망이다. 미 대선판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