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대장' 푸틴, 방중 땐 '얼리버드'
지난달 5기 임기를 시작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외 활동이 부쩍 분주해졌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는 미국 주도의 서방 제재에 부닥쳐 자칫 국가부도의 위험에 몰릴 뻔했다. 작년 6월 러시아의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반란을 일으켜 모스크바로 진격할 땐 푸틴은 가장 믿었던 심복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는 것처럼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일부 외신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후폭풍으로 1999년 시작된 푸틴 체제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푸틴은 올해 3월 러시아 대선에서 압도적인 득표율(87.8%)로 당선되었다. 2030년까지 권력을 연장하고 '현대판 차르(황제)'로서 종신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선거를 통해 '우크라이나 특수군사작전' 수행에 대한 자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확인한 푸틴은 첫 해외 일정으로 외교 수립 75주년을 맞은 중국을 국빈 방문했다.
세계 정상들과 회담할 때 자주 늦게 도착해 '지각 대장'으로 유명한 푸틴 대통령은 베이징 공항에 전용기로 꼭두새벽에 도착해 당일(5월 16일) 아침부터 밤까지 시진핑 국가주석과 12시간 이상을 함께하며 정상 간의 우의를 다졌다. 푸틴의 방문에 앞서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을 3년째 이어가고 있는 러시아군은 북동부 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며 기세를 올렸다. 푸틴이 미국과 서방 세계에 보내자고 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중국은 앞으로 우리의 뒷배를 확실하게 책임질 것이다."
과연 푸틴의 바램대로 중국은 러시아의 든든한 파트너이자 후원자로 계속 남을 것인가?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적대적 대립관계였던 미국은 1970년대 탁구 경기를 통한 이른바 '핑퐁외교'로 양국 관계를 개선하고 1979년 대만 단교와 함께 중국과 수교를 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고, 중국은 죽의 장막이라 불리는 고립주의를 타파하고 국경분쟁으로 관계가 악화된 소련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는데, 미국의 전설적인 외교 전략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이런 상황을 적절히 간파해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주도했다. 결과적으로, 냉전시대 국제질서는 급속도로 재편됐다. 미·중 간 해빙과 밀착으로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던 소련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련 붕괴이 후 중국은 개혁·개방에 속도를 내며 미국을 위협하는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현재 중국은 군사력은 몰라도 경제력에서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의 GDP보다 9배를 넘는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대외정책 역량이 인도.태평양 지역에 쏠린 틈을 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했다.
러시아의 '숨구멍'이 된 중국
중국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미국과 유럽의 동맹을 결속하게 만든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방의 제재로 고립된 러시아에 '숨통' 역할을 했다. 미국과 유럽은 동시다발적인 제재를 가했지만 중국은 러시아의 뒷배가 되어 서방의 제재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서방이 러시아산 원유 금수조치를 취하자 중국은 유럽을 대체하는 러시아의 최대 에너지 수입국이 되었다. 또 중국 기업들은 러시아에 '이중용도' 물품을 수출하면서 전쟁을 지속할 동력을 제공했다. 이중용도 상품이란 현대전 수행에 필수인 반도체 칩이나 공작기계, 광학장치 등 민간용으로 제조되었으나 군사적인 용도로 전용될 수 있는 상품을 일컫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예상된 시나리오와 달리 장기화되면서 에너지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는 전쟁 수행에 최대 걸림돌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중국과의 교역 확대로 경제적 안정을 찾고 장기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중국은 서방과의 관계 파탄을 우려해 러시아에 무기를 직접 지원하지 않고 있지만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적어도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은 막으려는 심산이다. 사실, 중국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얻는 것이 많다. 서방 기업이 대거 철수한 러시아 시장에 중국 기업과 제품이 몰려가고 있다. 원유시장에선 판로가 막힌 러시아산 원유를 중국은 국제시세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도입했다. 지난해 전 세계적인 수요 부진 때문에 중국의 전체 무역액은 5% 정도 감소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의 무역은 전년보다 26.3% 증가한 2401억 달러에 달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이후 러시아는 국제 자금 이동망인 스위프트(SWIFT)에서 축출된 이후 양국 간 무역 결제를 달러화 대신 루불화와 위안화로 하면서 서방의 제재를 피해 나갔다.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은 러시아에서 원유를 1억702만톤 수입했다.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중국의 최대 원유 공급국이 된 것이다. 중국 정유사들은 서방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 중개무역업자를 활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원유를 팔고 받은 위안화로 수입이 금지된 자동차나 생필품을 중국에서 대량으로 구매했다. 지난해 러시아는 전시경제 체제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국민들의 일상적 경제활동은 큰 문제가 없었다. 고용과 소비수요 등 경제의 각 부문은 되레 살아났다. 전쟁 초기 거셌던 반전 여론도 수그러들었다.
미국의 제재 위협에 중·러 무역 위축 기미
중국과 러시아 간 무역 거래 급증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양국 간에 통화 결제 시스템을 구축한 덕분이다. 푸틴은 시 주석과 회담하면서 양국 간 모든 결제대금 중 90%가 위안화와 루블화로 이뤄지고 있다며 "자국 통화로 결제하기로 한 러시아와 중국 당국의 시기적절한 결정이 무역을 강화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은 러시아 제재 회피를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 군산복합체와 거래하는 제3국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세컨더리 제재(제3자 제재) 시행에 들어간 바 있다. 미국은 이어서 러시아가 군용으로 전용할 수 있다고 의심되는 '이중용도' 상품 범위를 대폭 확대하고 대러시아 무역거래를 지원하는 대형 중국 은행에 대해 제재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제재 움직임에 중국 은행들은 최근 대러시아 무역거래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양국 간 교역은 올해 들어 크게 위축되고 있다. 올해 들어 중국의 대러시아 수출 상승세가 둔화되더니 지난 3월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 가까이 감소했다. 러시아가 위안화를 중국에 송금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러시아는 지난 4월에도 중국산 장비의 수입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푸틴은 이번 방중에서 급증하는 대중국 무역에서 결제하는 화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은행 총재와 국영은행 CEO까지 대동했다. 특히 이번 방문에서 관심이 집중됐던 러시아산 가스를 중국에 연간 500억㎥ 수송하는 '시베리아의 힘2' 가스관 계약은 체결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이 요구한 가스 공급량과 단가에 대해 러시아 입장에서는 무리한 수준의 요구를 한 것이 계약 불발의 이유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중국 정부가 '시베리아의 힘2' 관련 협상에서 보인 강경한 태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푸틴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얼마나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고 FT는 분석했다.
푸틴은 서방의 경제 제재를 이겨내고 러시아의 안정과 발전을 계속 도모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도움이 절실하다. 중국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레버리지로 사용하고 있다. CNN 등 주요 서방 언론은 푸틴은 시진핑과의 이번 회담에서 2022년 체결한 양국 간 ‘제한 없는’ 파트너십 협정에 대한 실질적인 결과물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거창한 수사에도 구체적인 공약은 거의 없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푸틴은 이중용도 품목을 포함해 전쟁이나 방위산업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바라고 있지만 시 주석은 서방의 '레드라인'을 넘지 않으면서 러시아와 최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경제학자 출신 러시아 국방장관
푸틴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기 직전 자신의 최측근 군부 인사로 우크라이나 침공을 주도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을 해임하고 그의 후임에 러시아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제1부총리인 안드레이 벨루소프 박사를 임명했다. 타스통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국방장관 교체 배경에 대해 "현재 러시아 상황이 군사비 지출이 크게 늘었던 1980년대 중반 옛 소련과 비슷해지고 있다면서 이 분야 지출을 국가경제 전반에 더욱 부합하게 해줄 민간인을 국방장관 후보로 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간인 출신 국방장관의 등장은 푸틴이 장기화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패가 병력과 자원 동원력, 또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의 버티기 싸움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푸틴은 중국 방문에 이어 장기화로 치닫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할 우군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주 바이든 대통령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푸틴을 '폭군' 히틀러에 빗대어 공격했다. 기념식에 초청받지 못한 푸틴은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경제포럼에 볼리비아와 짐바브웨 대통령 등 각국 인사를 초청했다. 이 자리에서 러시아의 전술핵이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핵폭탄보다 서너 배 강력하다며 미국과 유럽에 으름장을 놓았다.
안타깝지만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과 서방의 의지는 점점 식어가는 모습이다. 현재 연간 1000억 달러 정도인 서방의 지원 규모로는 우크라이군이 푸틴의 군대를 격퇴시킬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 20% 정도를 잠식했다. 현재 푸틴은 북동부 지역에서 승기를 잡아가며 현재의 전선을 기반으로 종전 협상을 추진할 가능성도 내비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하며 우크라이나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하고 싶어할 것이다. 1970년대 중국과의 수교 협상 과정에서 키신저는 "지금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지만, 언젠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러시아)과 손을 잡아야 할 날이 올는지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세계의 역사가 키신저의 말처럼 흘러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