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타 요시히로의 한일 풍경] 일본 내 정치불신이 뿌린 반지성주의 '논파' 문화

2024-07-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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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지난 7월 7일 치러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현 지사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가 291만8015표(도쿄도 유권자 1129만229명)를 획득하며 3선에 성공했다. 2위를 차지한 이시마루 신지(石丸伸二, 165만8363표)와 3위의 렌호(蓮舫, 128만3262표)가 그 뒤를 이었다. 이번 도지사 선거는 56명의 후보가 난립한 선거였는데, 그만큼 현 지사에 대한 불만이 컸다는 뜻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렇다 할 대안이 없었다는 것을 선거 결과가 보여주는 듯하다.

도지사 선거 과정은 불명예스럽게도 한국에서 화제가 됐다. 후보자에게 주어지는 공식 선거활동으로 일본 공영방송 NHK가 방영하는 정견방송이 있는데, 여기서 한 여성 후보자가 이유도 없이 상의를 벗고 속옷 차림이 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어떤 정당이 기부를 조건으로 자신들의 선거 벽보용 게시판을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그것을 활용해 일반인들이 음란하거나 선거와 무관한 내용의 벽보를 붙이는 등 코미디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선거전 가운데 각 후보의 정책이나 공약은 크게 검증되지 못했고, 활발한 정책논쟁 또한 시도되지 않은 채, 딱히 이룬 것도 없지만 큰 실책도 없었던 현 지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3선이 결정된 것이다.

나는 도쿄 도민이 아니기 때문에 투표권은 없지만, 과거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고, 식민지 시기에 일어난 관동대지진 학살 피해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것을 굳이 피하고 있는 고이케(2023년 9월 8일자 칼럼 “간토대지진 100년 …조선인 학살의 비극은 인권 문제” https://www.ajunews.com/view/20230907130407732 참조)의 낙선을 기대했었다. 역대 도쿄도지사가 그동안 보내던 추모문을 굳이 보내지 않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도쿄도가 조선인 학살의 사실을 경시 혹은 부정한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연한 태도로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도쿄도지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3위에 그쳐 낙선한 야당 입헌민주당의 렌호는 대만인 2세 정치인이다. 현 지사인 고이케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연예 활동을 하며 널리 알려졌다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인물로, 외국에 뿌리를 둔 것이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적인 시선을 받아온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해 도쿄도가 추모문을 보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외국에 뿌리를 둔 그가 도쿄도지사가 됐더라면 다양성과 과거사 직시 측면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현 지사의 3선이라는 결과는 매우 유감스럽다.

그런 가운데, 낙선했지만 2위를 차지한 이시마루가 지금 주목받고 있다. 그는 지방의 작은 자치단체인 아키다카타(安芸高田)시의 시장 출신이다. 41세의 젊은 나이에 전국적으로는 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던 그가 당초 현 지사 고이케의 3선을 막을 것으로 기대를 받던 야당 유력 후보 렌호를 제치고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애초부터 주요 언론들도 그를 크게 거론하지는 않았다. 선거전 마지막까지 현 지사인 고이케냐 야당 후보 렌호냐 하는 구도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고이케 3선은 예측했다고 해도, 대항마로 여겨졌던 렌호가 3위로 가라앉고 무명에 가까웠던 이시마루가 2위를 차지한 것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시마루가 도지사 선거에서 2위가 된 요인은 아키다카타시장 시절의 ‘활약’에 있었다. 그가 아키다카타 시의회에서 고참 의원, 즉 기득권층으로 보이는 의원들을 상대로 “부끄러운 줄 알아라!” 등 질책하는 모습이 담긴 짧은 동영상들이 SNS를 타고 퍼진 것이다. 도지사 선거 활동 중에도 그가 정책을 꼼꼼히 설명하는 모습보다는 구태의연한 정치인이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당당한 모습을 담은 짧은 동영상이 확산됐다. 유튜브나 SNS를 활용해 자신의 임팩트 있는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전략이 효과를 본 것이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이시마루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정치에 실망하고 혐오마저 느끼고 있던 중도파를 흡수할 수 있었다는 점과 애초부터 정치에 관심이 없던 젊은층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현재 개표 후 이시마루가 보인 일부 언론매체에 대한 대응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한 지상파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고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조로 대응하고,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하지 않으며 마치 가르치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SNS에서 짧은 동영상을 통해 퍼져나간 그의 모습은 매우 참신하고 통쾌했지만, 이른바 올드미디어를 통해서 전해진 그의 모습은 거만하고 상대를 우습게 여기는 듯한 독선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적어도 도지사 선거에서 유권자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밈을 활용한 홍보는 요즘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한다면 유용하고 당연한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래 정책에 따라 유권자의 대변인이 되어 정치를 하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정치인임을 감안한다면 역시 그의 언행은 마땅한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한편, 그러한 기존의 정치나 정치인에 질린 유권자에게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이다’ 정치인에 대한 기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일본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논파(論破)’라는 말이 유행하며, ‘논파왕’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인터넷 세계나 지상파 방송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 ‘니찬네루(2ch)’를 만든 인물로 이름이 알려졌고, 솔직한 발언과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며 상대를 ‘논파’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히로유키(본명 니시무라 히로유키[西村博之])’다. ‘논파’란 결코 성실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으로 상대를 어떻게든 몰아가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 ‘논파’에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느낀다. 히로유키는 세간의 권위나 직함과 같은 것을 절대 눈치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논리를 가지고 상대를 몰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일부에서는 그러한 ‘논파’를 멋있게 여기고 높이 평가하는 풍조를 ‘히로유키 현상’으로 부르며, 이제는 일본 사회에서 신드롬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뿌리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이시마루가 얻은 인기 또한 그러한 ‘논파’ 문화가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시장 시절에 보여준 구태의연하면서도 권위적인 시의원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질책을 퍼붓는 기개 있는 자세야 말로 ‘논파’하는 새 정치인의 모습이었다. 단순한 비교는 어렵지만, 한국에서 이준석 의원이 정치권에 처음 등장했을 때와 같은 임팩트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정치인의 등장은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제는 국정에서 어느 정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유신회’라는 정당이 있다. 방송에 자주 출연해 파격적인 스타일로 논의를 주도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은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가 만든 정당이다. 하시모토가 지금은 정치인 은퇴 선언을 했지만, 그의 거침없는 발언은 여전히 인기가 높아 평론가로서 지상파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며 사회적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하시모토는 과거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전쟁 당시 군대에는 필요했다”, 오키나와 해병대 사령관에게 “(병사를 위해) 유흥업소를 잘 활용해주었으면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사람들에게 그는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대변해주는 사이다 논객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사회학자 구라하시 고헤이(倉橋耕平)는 ‘논파’ 문화가 1990~2000년대에 걸쳐 일본 사회에서 대두한 역사수정주의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원래 역사란 사료를 바탕으로 전문가가 논해온 역사적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파’ 문화에서는 전문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가짜 뉴스와 같은 언설이라도 그것이 사실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사실처럼 격상됨으로써 오랜 세월 축적되어온 연구성과조차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논파’ 문화는 사실이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몰아가는 것이 ‘승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즉, ‘논파’ 문화에서 토론이란 새로운 뭔가를 낳기 위한 논의가 아니라, 단순히 승패를 결정하기 위한 게임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구라하시는 이렇게도 지적한다. “토론 자리에서 복잡한 현실이나 모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꼼꼼하게 논하게 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고 만다. 그래도 역사의 탐구에서는,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나 이항대립적인 논의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수정주의자가 논의를 단순화시키는 것은 역사 탐구가 주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불편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목적을 위해 논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논하는 단순화가 가능한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논파를 목적으로 하는 상대와는 성실한 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모습은 역사인식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논파’ 문화는 티비나 SNS와 같이 제한된 시간이나 글자 수 안에서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기법으로 시대에 부합했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상에서 짧게 “잘려져” 확산되는 이른바 짤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요즘 시대에는 성실하게 임한다고 해도 결국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논의 방법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그러한 가운데 “잘려진” 짤에 적합한, 승패가 확실히 갈라지는 논의가 대중 사이에서 선호되는 것이다.

최근 약 20년 사이에 정착한 일본어 중 ‘가치구미(勝ち組, 승자들의 팀)’과 ‘마케구미(負け組, 패배자들의 팀)’이라는 표현이 있다. 일본 경제 침체가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 사회는 사람들을 ‘가치구미’와 ‘마케구미’로 나누어 보게 됐다. 어떻게 자신을 ‘가치구미’로 만들어 성공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마케구미’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요령 있게 잘 살아갈 것인가 하는 생각이 사람들의 가치관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는 무관용이라는 폐해를 낳았고, 일본 사회를 숨막히게 만들고 있는 요인 중 하나이다.

고(故)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과거 가두연설 때 자신에게 야유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런 이들에게 질 수는 없다”라고 외쳤다. 한 국가의 수상(총리)이 자신을 비판했다고 해서 일반 시민을 “이런 이들”이라고 부르며,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번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도 응원연설에 나선 자민당의 고노 다로(河野太郞) 디지털 담당 대신(장관) 또한 야유를 퍼부은 청중에게 “이런 패거리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해 물의를 빚었다. 고노 역시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하는 스타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인물인데, 차기 총리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정치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언을 한다는 것은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경시한다고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행동이다.

자신의 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해 논의나 대화의 여지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거부까지 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감정에 호소할 뿐이다. ‘반지성주의’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논파’ 문화는 후퇴하는 일본 사회가 자신감을 잃고 내향적 성향을 지니면서 안게 된 새로운 사회적 병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베 정권 무렵에 자주 듣게 된 이상한 일본어로 자국민을 향해 말하는 ‘반일’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일본인이더라도 ‘반일’이라고 조롱을 받고 매도당했다. 과거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일 때 일본 사회가 폄하했던 표현이 ‘반일’이라는 말이었는데, 그 ‘반일’이라는 말이 자국민을 향해 쓰이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논리도 제대로 된 토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히 ‘적’을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만 있을 뿐이다.

한·일 간에는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다양한 문제가 존재하고, 특히 ‘위안부’와 강제노동을 둘러싼 문제는 인권문제로 주목받고 있다. 피해자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주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접근법으로 다가가면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날 위험성이 높고, 역사수정주의의 주장을 조장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자세는 ‘반일’이 아니다. 반대로, 감정에 호소해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방법으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 역시 본질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필요없는 ‘적’을 만들어 무관용을 부르게 되고, 이는 문제 해결을 늦추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일본의 ‘논파’ 문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동시에, 인터넷을 통한 정보 확산이 큰 영향력을 가지는 요즘 시대이기에 ‘반지성주의’의 위험성은 일본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그 간극을 이용하는 정치인도 등장한다.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을 깎아내리는 것 자체가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주장이나, 그에 실망해 정치 불신에 빠지는 많은 시민들은 ‘논파’ 문화에 농락당하고 있다. ‘반지성주의’를 환영하고 그것을 활용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지 냉철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필자 주요이력

△후쿠오카대학 인문학부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준교수 △연세대 정치학박사 △전 홍익대 조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관 전문조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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