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군 기지 배후지서 국내 최대 부촌으로
한남동은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100년 전만 해도 일본군 병영의 공동무덤으로도 사용된 곳이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용산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근대 시기 용산은 용산나루를 중심으로 서해 일대와 한강의 화물 및 사람이 모여드는 주요 포구였다.
물자가 풍부한데다 한강을 통해 서울은 물론 인천을 빠르게 오갈 수 있었던 지역인만큼 군사적 가치도 상당했다. 구한말 이권 침탈에 나섰던 열강의 눈길을 가장 먼저 끌었던 곳도 용산이었다. 1882년 청군이 임오군란 진압을 명목으로 주둔을 시작한 이래 용산의 고난도 시작됐다.
이후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잇달아 승리하면서 용산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사령부가 됐다. 현재 남아 있는 용산정비창 터와 용산공원 터는 당시 일본군의 철도기지와 군사기지가 들어섰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6·25전쟁을 계기로 옛 일본군 기지부지를 미군에 공여해 주한미군의 주둔지가 됐다. 용산기지로 더 잘 알려진 해당 부지는 지난 2022년 말 한미연합사가 반환을 완료하면서 2027년까지 국가 공원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해방 후 용산에 미8군이 주둔하면서 한남동도 이태원동과 함께 미군 부대의 배후지로 다시 한 번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 서울 내 외국인들의 거주 장소로 자리잡으며 현재도 부촌으로 유명한 유엔빌리지 등의 주거지역이 이 당시 새롭게 들어섰다. 이와 함께 각국의 대사관과 대사관저도 들어서며 한남동만의 특색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한남동을 가로지르는 대사관로 등의 지명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이어 매봉산 서쪽 기슭을 중심으로 3요인과 부처 장관 등을 위한 공관들이 잇달아 형성되며 ‘공관촌’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한남동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형성됐다.
여기에 더해 1969년 서울 도시계획(영동지구 개발계획)에 따라 한남대교(옛 제3한강교) 개통, 1970년에는 남산1호터널 개통 등으로 한남동은 명동과 강남 개발을 잇는 요충지로 자리매김 했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현지 이태원역 인근 대저택촌을 중심으로 굴지의 재벌그룹 회장과 일가가 거주하는 부촌이 1980년대까지 형성됐다.
2000년대에도 2011년 단국대 서울캠퍼스 부지에 들어선 '한남 더힐'을 중심으로 '한남 하이페리온', '한남 힐스테이트', 2019년에는 '나인원 한남' 등이 잇달아 들어서며 국내 대표 부촌으로 입지를 공고히 했다.
한남동은 다시 한번 최대 고급 주거지로의 새로운 변신을 앞두고 있다. 한남뉴타운 사업지 중 최대 사업장인 한남3구역이 이르면 올해 분양을 앞두고 있어서다. 한남동에서는 독서당로 서쪽에 한남3구역이 자리잡게 된다. 지난 2020년 6월 현대건설이 해당 사업의 시공사로 선정된 바 있다. 디에이치 한남이라는 이름으로 6006세대, 지하6층~지상22층 높이 공동주택과 주상복합, 부대복리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2029년 입주가 시작되면 한남동 전체가 고급 주거지로 자리매김하게 될 전망이다.
여기에 인근의 다른 한남뉴타운 사업 역시 속도를 내면서 주변을 아우르는 한남동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전망이다. 서울시는 이달 한남재개발 사업지 중 한강변에 가장 인접해 최우수 입지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한남5구역의 건축 심의를 통과시켰다. 한남5구역과 한남4구역은 올해 시공사 선정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인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