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47) 식민주의 좌초시킨 '디엔비엔푸 대첩' 70주년 맞이하는 베트남

2024-04-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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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안경환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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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응우옌잡 장군(1911.8.25~2013.10.04)

 
베트남은 아시아국가로써 사상 최초로 유럽의 강국 프랑스와 싸워 승리하고 식민지배의 사슬을 자력으로 끊고 독립을 쟁취하였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곳이 디엔비엔푸이고, 금년 5월 7일은 디엔비엔푸 대첩 70주년(1954.5.7-2024.5.7)이 된다. 베트남은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기 위하여 디엔비엔성(省) 공설운동장에서 예포 발사를 시작으로 공군 헬기의 축하비행과 보병 부대의 열병 및 시가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디엔비엔푸는 라오스와의 국경으로부터 10km 떨어진 인구 8만 5천 명 규모의 작은 도시이다. 생전에 호찌민 주석은, “디엔비엔푸 대첩은 역사의 시금석이며, 식민주의를 좌초시키고 민족해방운동을 세계 곳곳으로 확산시킨 세계 모든 피압박 민족의 승리”라고 극찬했었다. 보응우옌잡 장군이 진두지휘한 디엔비엔푸 대첩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연합군 총사령관-미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 지상군 사령관-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과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주도로 한반도에서 전개된 인천상륙 작전처럼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전투로써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전투였다. 전승과 동시에 세계의 이목은 라오스와의 국경에 인접한 산악지방의 작은 도시 디엔비엔푸에 집중되었고, 평화는 종잇장만으로는 결코 담보할 수 없는 것임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었다. 디엔비엔푸 대첩은 호찌민 주석의 영도력에 더하여 전 국민의 대동단결, 베트남 인민군대의 충성심과 필승의 의지로 얻어진 결과였다. 디엔비엔푸 대첩으로 프랑스 식민지배와 미국의 프랑스 지원에 대항하여 싸워온 8년간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인도차이나반도 식민지 3개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가 프랑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호찌민이 주도한 1945년 8월 혁명이 성공하면서 북부 베트남에서의 사회주의 체제가 공고화되었고, 나아가 남부 베트남의 해방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베트남 민족에 강국 프랑스와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1930년 2월 3일 창당된 베트남공산당이 국민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게 되었다. 아울러 아시아에서 프랑스 식민주의 아성을 무너트렸고, 미국이 옹호하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글로벌 전략이 실패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승리를 위해서 베트남 독립세력은 사회주의 우방국의 전방위적인 지원을 활용하면서 적과 싸우며, 세력의 근본적인 변화를 유도하여 싸울수록 산악지역에 익숙한 베트남군의 공격력에 프랑스군은 궁지로 몰려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디엔비엔푸 대첩은 피압박 민족이라도 강한 의지로 민족의 자존을 위해 대의를 다하고, 독립과 자유를 위해 단결하여 싸우는 민족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증명해 주었고,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국가들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립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베트남은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세계 3대 강국과 싸워서 이긴 민족이다”라고. 3대 강국이란, 13세기에 몽골, 20세기에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치고 독립과 통일을 달성한 것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1898.7.31-1983.9.26) 장군의 작전 실패였다. 앙리 나바르 장군이 1953년 11월 내륙 깊숙이 위치한 디엔비엔푸를 요새화한 것은, 호찌민 세력을 야전으로 끌어내어 프랑스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승부를 보려는 계산이었으나, 보응우옌잡 장군이 지휘하는 5만 명에 이르는 농민들은 보급선을 구축하여 디엔비엔푸로 중국제 무기를 비밀리에 수송하여 결전에 대비하였다. 베트남군은 개전과 동시에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하고 비행장 활주로를 포격하여 프랑스 공군력을 무력화시켰다. 포위 공격은 5월 7일까지 45일간 계속되어 프랑스군의 마지막 보루를 무너트렸다. 1만 6천 명의 프랑스 주둔군의 참패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난 뒤 다시 식민지배 야욕을 드러낸 프랑스를 무릎 꿇리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종전 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협상에서 프랑스 측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완전 철수하기로 합의했고, 베트남은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호찌민 세력은 북부를 장악했고, 남부에는 미국이 지원하는 반공 정부 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피비린내 나는 베트남 전쟁의 서곡이 울려 퍼진 것이다. 가난한 봉건 국가 베트남이 거대한 식민세력 프랑스를 물리쳤으나, 한국전쟁 후 냉전 시대의 뜨거운 화약고가 베트남으로 이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디엔비엔푸 대첩으로 베트남은 독립을 달성하였지만, 남북 분단과 통일을 향한 전쟁의 아픔이 예고된 것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을 절대로 남‧북 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끼리 남북전쟁을 한 것이 아니고, 외세 배격을 위한 항미(抗美) 전쟁”을 한 것이라고 한다. 21세기 한반도 통일은 베트남의 무력 통일방식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민주평화통일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는 베트남 통일 주체 세력이 한 민족에 전하는 고언(苦言)이기도 하다. 그들은 평화는 결코 종잇장으로 담보할 수 없음을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전) 조선대 교수 ▷전) 베트남학회 회장
▷전) KGS국제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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