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자 한 일간지 8면의 배너 헤드라인은 “달라진 한국 사회 . . . 권위주의에 대한 분노가 이념·도덕 다 삼켰다”였다. 이번 선거의 국힘당 패배가 (‘좌파’후보들의 중대한 도덕적 결함조차 상대적으로 하찮게 여겨지게 하는) 윤 대통령의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라는 분석에 동의하는 다섯 명의 저명 사회학자들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권위주의를 패륜이나 범죄, 반국가적 이념보다도 더 증오하고 위험시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생소하고 참으로 믿기 어려운 개념이다. 물론, 일생을 여러 형태의 권위주의 하에서 살아 온 사람으로서 권위주의의 혐오스러움은 늘 체감하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 선거에서, 전에는 그런 하자를 가진 인물이 국회의원 후보가 될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던, 야당 후보들의 도덕적 하자는 그 후보 본인뿐 아니라 그들 소속당의 다른 후보들마저 국민의 선택에서 제외시킬 것으로 믿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여당의 참패가 점쳐지고 있을 때도 설마 그럴까, 했는데, 집계가 나오니 ‘이게 나라냐’싶으면서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1945년에 일본이 패전하고 연합국이 승리해서 ‘공짜로’ 얻게 된 해방은 윤치호의 신념의 시험장이었다. 그리고 1945-48년의 소위 ‘해방공간’의 극도의 혼란과 4·3사건, 대구폭동, 여순반란 등 살벌한 이념대립과 좌우갈등은 윤치호의 신념이 옳았음을 증명해줄 뻔했다. 다행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성장한 몇몇 민족지도자들과 이승만대통령의 비전과 지혜와 필사적 노력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수립되었다. 천재일우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어려운 건국 후에도 2년이 못 가서 6·25 전쟁으로 남북한 통산 300만의 사상자가 났고 전국이 초토화되었지만 그 후 온 국민이 국가건설에 매진해서 몇 십년 사이에 국민소득 58불에서 3만불의 세계 10위 경제대국이 되었고 K-컬처가 전 세계의 총아가 되었으니 윤치호 선생의 예언은 다행히도 맞지 않았다.
물론, 필자는 신생 대한민국과 함께 성장하고 나이 들면서 참으로 많은 부정 부패와 비리를 목격하면서 분노와 절망도 무수히 느꼈고 사리사욕에 나라 골병드는 것을 괘념치 않는 악질분자들 때문에 나라가 무너질듯한 위기를 느낀 적이 많다. 공무원 비리, 법조 비리, 기업 비리 등등 무수한 비리가 이 나라를 좀먹었다. 힘없고 가난한 서민을 울린 사기, 협잡배들 . . . 정말 우리나라는 그런 자들 때문에 어느 날 다시 적수공권의 국제고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위로하고 안심시킨 것은 소리 없이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나라를 보듬는 보통 시민이었다.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6·25 전몰용사는 말할 것도 없지만 파월장병들, 파독 광부, 간호사들은 목숨 걸고 외화를 벌어서 조국건설의 종잣돈을 제공했다. 열사의 땅에서 사막에 수로를 판 중동건설 노동자와 머리칼을 한올 한올 심어서 가발을 만들어 수출한 여공의 공로 역시 어찌 잊겠는가? 그리고 자기 맡은 일을 묵묵히 성실히 해낸 보통 사람들의 노고가 우리나라의 뼈와 살이 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라의 정수리에 도끼질을 해대는 큰 도둑이 나타났다. “남북관계만 잘 되면 다른 것은 다 깽판쳐도 된다’면서 국가대사를 소홀히 하고 지극정성 김정일의 마음을 사려고 애쓴 대통령도 있었다. 세월호 사건을 해괴하게 뒤틀고 부풀리고 각색해서 집권한 문재인은 집권하자마자 탈원전을 선언했다. 우리 경제의 피와 같은 전력을 고갈시켜 국가경쟁력을 약화하려 했고 소주성이란 터무니없는 경제정책으로 청년실업자를 양산하고 물경 스물여섯번이나 수정한 부동산정책으로 집값을 폭등시켜 계층간 위화감을 부추기고 중산층에게서 막대한 종부세를 수탈하고도 나라 빚을 400억이나 늘려 놓았다. 그 대부분이 현금뿌리기 포퓰리즘 정책에 쓰이고 김정은의 방석 솜이 되지 않았겠는가?
거기에 9·19군사합의 등으로 김정은이 언제라도 북에서 밀고 내려올 수 있게 길을 닦았다. 이처럼 온 국민이 수십년 동안 이룬 것을 피괴하는 죄는 살인보다 몇 천, 몇 만배 중한데 문재인은 온갖 특권을 누리며 편히 살고 있다.
그를 옹위하는 민주당은 21대 국회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점유하고 의회독재를 마구 휘둘러 행정부의 숨통을 조였다. 그래서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이 당선되었다면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은 명줄이 끊겼을 터인데 천우신조로 0.73퍼센트 차이로 윤석열 대통령이 승리했다. 그래서 이번 대선만 제대로 치러져서 균형있는 국회가 되면 나라가 안정을 회복하려나 기대했는데 오히려 국회가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결과가, 범죄자소굴 국회라도 윤석열의 권위주의보다는 낫다는 국민의 선택이라면 몸서리치게 싫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여러 개 올라오는 선거 부정 사례도 다 근거가 충분해 보이는 등 이래저래 심란하고 단념을 하기가 어렵다. 선거 부정은 시급히 철저한 수사로 밝혀야 할 텐데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지옥 같은 정국의 수습은 윤 대통령이 앞장서서 해야 할 텐데, 이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울 텐데 심기일전해서 국정에 매진한다는 것이 지난(至難)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고 누가 하겠는가? 그래서, 윤 대통령의 ‘아우라’는 많이 증발되었고 그의 장점으로 생각되었던 면들이 다분히 단점으로 보이게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보수우파가 그를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거대야당의 등쌀에 하루도 편할 날 없을 윤석열 대통령이 완전히 고갈되지 않도록 SNS도 보내면서 격려하고 소통하면 대통령도 국민이 우군임을 느끼며 힘이 날 것이다. 대통령과 국민이 함께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우리 세대의 정치적 의사표시는 조만간 최고인민회의에서 ‘찬성’ 푯말을 들어 보이는 것이 전부이게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영문학과 학사 ▶미국 웨스트조지아대학 영문학 석사 ▶뉴욕 주립대학 영문학 박사 ▶1974년 이래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