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미국, 가난한 유럽>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미국과 유럽은 ‘경제 성적표’의 차이가 크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우등생’인 반면 유럽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는 성장 부진 블록이다. 미국과 유로 지역은 1995년에만 해도 경제 규모가 비슷했지만 이후 30여 년간 차이가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미국 경제는 1995년의 두 배 정도 수준으로 커진 데 비해 유로 경제는 1.5배를 조금 넘는 정도에 그쳤다. 이 같은 격차는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한국은행은 2010~2019년 중 미국과 유로 지역의 성장세 차별화는 생산성과 노동력 차이 등에 따른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 기간에 미국의 성장률이 유로 지역보다 연평균 0.9% 포인트가 높았는데 이 중 절반이 넘는 0.5% 포인트는 생산성, 그리고 0.4% 포인트는 노동 투입의 차이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결국 생산성이 미국과 유로 지역의 성장 격차를 가져온 주요인임을 알 수 있다. 생산성 측면에서 미국은 기술혁신과 고숙련 인재 유치 등으로 우위를 유지해왔다. 반면에 유로 지역은 첨단산업에 대한 정책적 육성 노력이 상대적으로 부진한 데다 연구개발 투자도 미흡하고 이민 인력이 저숙련자 위주여서 낮은 생산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얘기해온 일본의 사례, 그리고 미국과 유로 지역의 비교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바로 경제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는 변수가 총요소생산성이라는 사실이다. 총요소생산성은 노동생산성보다는 범위가 큰 개념이다. 경제 전반의 총체적 효율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어떤 상태에 있을까? 답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전신인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초에 내놓은 ‘총요소생산성 현황과 경쟁력 비교’ 결과를 보면, 미국의 총요소생산성 수준을 1로 봤을 때 한국은 0.614로 큰 차이를 나타냈다. 미국을 포함해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의 평균치인 0.856에도 크게 뒤처져 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한국 산업 전반의 총요소생산성이 선진국 중위값 대비 약 67%로 부진하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낮은 수준의 생산성은 국가경쟁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2023년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64개국 가운데 28위로 한해 전보다 1단계가 떨어졌다. 국가경쟁력이 약화된 것은 정부 효율성 순위가 2단계 내려간 탓이 크지만 기업효율성 부문에서 생산성의 순위가 하락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2021년에 31위까지 올라갔던 생산성 순위는 지난해에는 41위로 10계단이나 내려앉았다. 총요소생산성을 구성하는 노동생산성에도 ‘빨간 불’이 켜져 있다. 노동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2022년 기준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3.1달러로 OECD 회원국 중 28위에 그쳤다. 독일(68.5달러)과 비교하면 62.9% 수준으로 격차가 37%가 넘는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총요소생산성이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한국 경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향후 한국 경제의 진로를 생산성이 좌우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한은은 ‘한국경제 80년(1970~2050) 및 미래성장전략’ 보고서에서 2010년대 이후의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 축소가 성장률 하락의 주된 요인이라며 향후 30년의 경제 성장은 생산성 기여도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생산성이 높거나 중간 수준인 시나리오를 전제해도 성장률은 2020년대의 2%대에서 2040년대에는 0.1~0.2% 선으로 하강 곡선을 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산성이 낮은 시나리오 아래서는 2040년대 성장률이 마이너스 0.1%로 뒷걸음질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기적으로 플러스 성장률을 유지할 것이냐의 여부가 생산성에 달려 있는 셈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한은의 이 같은 회색빛 전망에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KDI는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2010년대의 0.7%에서 OECD 상위 25~50% 수준인 1.0%로 올라설 경우 2050년 성장률이 0.5% 내외로 전망되지만, 생산성이 개선되지 않으면 성장률이 0%로 하락해 한국 경제가 ‘제로 성장’의 늪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이처럼 생산성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변수로 떠올라 있다. 그런데도 이를 중시하고 생산성 개선에 ‘올인’하는 정책적 노력과 사회적 공감대를 감지하기 어려운 게 솔직한 현실이다. 정부의 경제정책 청사진을 봐도 생산성에 관한 관심은 다른 현안에 밀려 있다. 기업과 가계 등 경제주체들에게도 생산성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거의 형성되지 않은 모습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풀어갈 과제가 생산성이라는 해답이 주어져 있는데도 이에 대한 ‘큰 그림’이 제시되지 않은 채 적절한 대책이 추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은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는 길을 재촉할 뿐이다. 물론 총요소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은 복잡다단하다. 생산성 부진을 가져온 요인인 혁신성과 인적자본, 규제, 사회적 자본에 그 답이 있는데 여기에는 경제적 변수뿐만 아니라 신뢰라는 비경제적 요소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잃어버린 미래’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제기된 숙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 총요소생산성을 개선하는 것은 사회와 경제 전반을 혁신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정부와 기업, 정치권, 그리고 개별 경제주체들이 각자의 몫을 다해야 한다. 먼저 정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그랜드 플랜’을 내놓고 신성장 동력 확보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의 전환, 인적자본 확충, 규제개혁, 중소기업과 서비스 부문의 경쟁력 강화, 공정한 신뢰 사회 구축 등에 주력해야 한다. 한 마디로 거시경제 운용을 생산성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도 산업현장에서 생산 효율을 올려 노동생산성을 개선하고 연구개발의 성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정치권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상호 적대시하는 갈등 구조를 해소하고 협치의 ‘텃밭’을 일궈냄으로써 신뢰 등 사회적 자본을 구축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개별 경제주체들도 불신 대신 신뢰, 갈등 대신 화합의 씨앗을 뿌려 사회 문화를 일신(一新)해내야 한다. 신뢰가 형성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행복과 복지에 기여한다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자본과 노동의 양적 투입을 늘린 성장에 기대왔다. 더 이상 이런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총요소생산성을 올리는 질적 성장이 시대적 과제로 주어졌다. 이는 경제는 물론 사회 전반을 환골탈태(換骨奪胎)시키는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힘을 합해 잘 대응해낼 것인가의 여부에 따라 한국 경제의 미래 궤도가 정해질 것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