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를 국민 축제라고 말은 하지만 즐거움이 빠진 행사여서 국민들의 관심도 자꾸 멀어져 가고 있다. 즐거움은커녕 증오와 분열만 보인다. 원래 정치란 것이 그런 거라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솔직히 정치인이 TV에 나오면 재미있나. 감동이 있나. 누구 얼굴이 나오면 그를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욕부터 한다. 이런 것은 개인 교양 수준의 문제겠지만 옆에서 듣기에는 기분이 편치 않다. 심한 경우에는 근로자들끼리 편이 갈라져 정치적 설전으로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그래서 그런지 노동자들의 식당에는 늘 가수들의 오디션이나 오락 프로그램만 틀어 놓는다.
선거를 ‘국민축제’라고 하는 말은 아마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만든 광고 카피가 아닐까 생각한다. 원래 축제는 공동체의 참여와 화합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기획한다. 하지만 우리 선거판은 증오만 키우고 분열만 양산하는 싸움판이다.
국회의원 선거라고 함은 이 나라 민의를 대표하는 일종의 국가대표 선발전이다. 국가대표의 깜(감)이 되는지 함량이 되는지 과거의 이력을 보며 검증하여 뽑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오디션 프로그램에 익숙해져 스포츠나 예능프로그램에서 대표를 선발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봐왔다. 누군가 힘있는 사람의 영입이나 추천을 차단하고 오로지 선수의 실력, 끼, 능력, 열정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경쟁하게 하여 수준을 높여 나간다. 검증의 이 과정이 보는 자체가 감동이고 기쁨이다. 전문가들이 내놓는 엄중한 비평을 들으면서도 겸허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도전하는 모습, 후보자들 간에 경쟁은 치열하게 하면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응원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왜 그럴까. 기획사의 문제일까 아니면 팬들의 문제일까. 아니면 민주주의라는 이 판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정치 스타를 키우려는 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민주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AI 시대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민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호기심과 질문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정치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끓는 물에 웅크린 개구리 꼴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한 세계 최초의 나라라고 자랑했고 자긍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왜냐하면 산업화나 민주화라고 하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금도 우린 현재 진행형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진행형이라 하는 것은 내 몸으로 체화하고 몸으로 익혀 나가는 것을 말한다.
서구의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번역해 사용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번역한 것은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번역한 말을 우리는 같은 한자권이라는 혜택으로 그 용어를 음차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도 처음에는 데모크라시를 번역할 수 없어 ‘德謨克拉西’ (demokelaxi)라고 표기하다가 고전에서 말하는 民主라고 표현했다. 이때 민주는 ‘백성의 주인’인 군주를 의미했고, 신해혁명 시기에 와서야 ‘백성이 주인’의 의미로 민주를 사용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민의정치, 민본주의, 민중정치라고 번역해 오다가 민주주의로 정착해왔다고 한다. 민주 뒤에 ‘-주의’라고 붙인 것은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천황제를 신봉해 왔기 때문에 군주의 백성에 대한 통치이념인 유교의 민본주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서구의 이 민주정치제도를 백성이 군주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처음엔 하극상(下剋上)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어찌 되었건 우린 이웃나라에서 고심하며 번역한 용어를 손쉽게 음차해서 사용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어떤 사물이나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 쓰임새와 내력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그 본질을 알 수 없거니와 내 것으로 만들기 어렵다. 그저 겉모습만 보고 흉내만 내기 때문이다.
선거일이 다가오는데 우린 지금 뭘 하자는 것인가?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상대에게 복수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치부를 덮어버리고 자신의 사적이익을 넓히자는 것인가. 내 보기엔 우리 선수들 대부분이 그 정도 함량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없다. 자신이 국가대표가 되겠다면 이런 나라를 만들어 가겠다는 출사표가 보이지 않는다. 고작 주장하는 것이 있다면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예산을 많이 따오겠다, 혹은 어떤 시설을 유치하겠다는 자신의 힘만을 과시하는 공약이 대부분이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적당한가. 북한에선 인민이 굶어 죽는 판에 이름뿐인 인민민주주의라는 군주제를 실시하며 인민의 낙원이라고 뽐낸다. 이런 체제를 대면하는 우리 민주제는 우리 국민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의 대표들은 180여 개의 특권과 연봉은 세계에서 넷째로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국민과 나라를 위해 도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지 모를 지경인데 이런 사람들이 굳이 필요할까? 차라리 전문가 그룹에게 위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것이 해고하기도 쉽다.
3월이면 우리는 3·1절을 기념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이며 외쳤던 ‘대한독립만세”가 독립될 나라인 대한민국이 국왕을 옹립하는 군주제인 대한제국이나 조선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였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만들어 갈 민주주의가 어떠해야 하는지 더 세밀하게 배려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세계 문화를 리드할 문화선도국이라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과거 한국을 식민통치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원색적인 비난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산업의 중추인 건설업의 노동자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용직 근로자다. 일용직이라는 것은 날품팔이라는 의미다. 용어 자체가 인스턴트하다. 언제든 쓰고 버리는 존재들이다. 다들 명품 아파트에 살고 싶어하지만 아파트를 만드는 건설인을 명장으로 만들겠다는 국가정책도 없고 교육 프로그램도 없다. 노동자가 더 필요하면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겠다는 편하고 쉬운 발상만 한다. 그러면서 선거 때만 오면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깊이 간직하겠다고 말만 나부낀다.
북한은 미국과 대화하기 위해 핵을 만들었다고 하다가 이제는 남한을 핵전쟁으로 접수하겠다며 위협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통일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는 서로 따로 살자는 여론도 높아져 가고 있다. 그렇다고 통일을 포기할 것인가. 통일된 나라가 어떠해야 하는지, 남과 북이 합의할 수 있는 통일 비전이 무엇인지 모색하거나 연구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본인의 삶이 타인의 인권을 빼앗거나 무시하면서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 통일의 비전도 없이 통일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소음을 양산하는 공해다.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치적을 쌓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세계에 유례 없는 저출산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국가인력개발계획도 없이 외국인노동자 쿼터제만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이끌어가겠다는 선수라면 로버트 달 교수가 말한,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정직이나 공정의 가치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며 이를 위한 시민의 용기와 사랑이라는 휴먼 가치를 어떻게 실행하고 보존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끄러운 선거 확성기 앞에서 어제 인사동의 전시회에서 한 작가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기계로 대량생산된 개성 없는 기성품이 넘쳐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소비를 강요받고 있는 우리 사회에,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고요함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소유의 욕망에서 벗어나 고요와 평안을 느낄 수 있고 시대가 변해도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우리 것의 고유한 가치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우리 정치도 그랬으면 좋겠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건국이념으로 채택한 5000년의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다. 픽-하고 웃어 넘길 옛날얘기가 아니라 이 비전을 현대에 맞게 세련되게 리폼해서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나라의 지표가 되면 좋겠다. 이번 투표도 선동가의 구호에 흥분하지 말고 존엄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며 의무를 다해가는 민주시민이 되길 기대해 본다.
이두수 작가 소개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건설 현장의 안전을 위해서는 규제보다는 노동자의 인문학적 소양 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생활실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