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9일 새벽 전세계 니케이225 옵션 투자자들 중 한국의 투자자들에게만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 야간장에서 풋옵션 가격 상승으로 고객들에게 일시적 평가손실이 발생하자 국내 한 증권회사가 고객들의 포지션을 전량 강제청산 해버린 것이다. ‘시세 변동에 의한 장중 미수 발생가능성’이 그 이유였다.
고객의 자산은 모두 없어졌고, 증권회사는 청산비용이 들었다면서 돈을 더 내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발생한 고객 손실이 800억 원이 넘었다. 반면, 한국을 제외하고는 일본은 물론 어디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같은 포지션이었어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국을 제외한 해외 투자자들은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심지어 해당 증권사마저 자신의 고유자산으로 투자한 것은 대규모 평가손실에도 청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니케이225 옵션은 유럽형으로서 미국형과는 달리 만기에만 권리행사가 가능하다. 만기 전에는 옵션가격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미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 오사카거래소는 옵션의 가격 변동에 의한 평가손실을 고객의 계좌에서 유지해야 하는 증거금 산정에만 반영할 뿐이다. 당시 오사카거래소는 미국 CME그룹이 개발한 SPAN 증거금을 이용했다. 개별 계약 기준이 아니라 해당 계좌의 모든 포지션을 토대로 위험성을 산출해 필요한 증거금을 산정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오사카거래소는 매일 옵션가격 종가 기준 평가손익을 증거금 산정에 추가로 반영한다. 평가손실이 발생하면 고객이 유지해야 하는 증거금이 증가한다. 평가손실이 나타내는 위험은 이미 증거금 산정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오사카거래소나 일본의 증권회사들은 옵션가격의 변동에 의한 평가손실을 강제청산의 사유로 삼지 않는다.
이렇게 장내파생상품거래의 위험관리를 강제청산이 아니라 증거금으로 하는 것은 우리보다 앞서 파생상품시장을 유지해온 해외에서도 일반적인 방식이다. 국내 투자자의 해외장내파생상품 거래를 제외하면,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한국거래소는 코스피200 옵션에 대해 기초자산가격과 행사가격 등을 토대로 증거금을 산정한다. 옵션의 평가손실이 발생한다고 증권회사가 강제청산을 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국내 증권회사들의 코스피200 옵션 거래 관련 약관도 마찬가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증권회사들이 이렇게 증거금으로 위험관리를 하는 것은 중개행위의 특성상 불가피하기도 하고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고객의 위험은 그 투자전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중개행위만 하는 증권회사는 이를 알 수 없다. 파생상품 투자에서 반드시 필요한 헷지 거래는 동일한 증권회사의 하나의 계좌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증권회사의 여러 계좌를 통해서도 한다.
그래서 전체 포지션이나 위험 관리를 알 수 없는 증권회사가 함부로 강제청산을 했다가는 도리어 고객은 물론 자신도 위험에 빠지게 한다. 증권회사가 고객에게 증거금을 계좌에 유지하게 하고, 그 사용을 제한하는 증거금 관리를 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국내 투자자들에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해외장내파생상품 거래를 위한 계좌 개설에서, 국내 증권회사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금융투자협회 표준약관에 중대한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약관 제14조 제1항은 증권회사의 마진콜(증거금 추가 납부 요구)에도 불구하고 증거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고객의 자산을 강제로 청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위험관리 수단이 증거금이므로 그것을 납부하지 않은 경우 강제청산을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는 해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약관 제14조 제2항이다. 이 조항은 장중에 시세가 급변하여 일정 비율 이상 평가손실이 발생하면 마진콜을 할 필요도 없이 증권회사가 고객의 자산을 강제로 청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표현만 보면 꽤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적용에 들어가면 오사카거래소의 상품인데 일본 증권회사는 증거금만 받으면 된다고 하는 것을 국내 증권회사는 즉시 강제청산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위 약관 조항이 위법하여 무효라고 판단했다. 자본시장법에 위반되고, 유럽형 옵션인 니케이225 옵션에는 적용될 수도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왜 그 전에는 이 문제가 밝혀지지 않았을까? 원인은 법원의 판단을 받기 전에는 사실상 불공정한 약관이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 사건 소송에서 해당 증권회사는 금융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심사를 받은 약관이므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서울고등법원은 두 기관에 사실조회를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회신은 금융위원회의 통보를 받아 심사를 했지만, ‘약관조항 자체의 문언적 의미를 추상적으로 심사’하여 불공정 여부를 판단하였을 뿐 구체적인 적용과정상의 문제는 심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금융위원회는 끝내 회신을 하지 않았다. 결국 소관부처인 금융위원회는 약관 심사를 하지 않았고, 공정거래위원회는 문구만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 지금의 약관 통제 시스템에 의하면 그 적용 과정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있더라도 표현만 그럴 듯하게 해 놓으면 된다는 의미다. 수백억 원의 고객 손실을 초래한 황당한 약관이 그 동안 적용될 수 있었던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해외 투자자들이 보면 웃음거리가 될 우리의 후진적인 금융사고는 위법·불공정 약관과 이를 제대로 심사할 수 없는 대한민국 정부 시스템이 낳은 것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일부 문제가 드러났지만 이런 식의 부실한 시스템에 의하면 언제 어디에서 또 대형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다. 대책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