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학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준비도와 여건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 지난 24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주요 정책 추진계획'에서 무전공 입학의 강제적인 도입과 확대는 일단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해당 정책은 느닷없이 발표되었고 의외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신속하게 철회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육부의 졸속행정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고, 무엇보다도 대학에 대한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무지와 그의 왜곡된 대학관이 드러났다.
무전공 입학이란 대학이 입학 정원의 일정 부분을 전공·학과 등 구분 없이 모집하는 전형을 가리킨다. 무전공 입학생들은 재학 초기에 기초·교양과정을 이수하면서 적성과 흥미에 맞는 전공을 탐색하고 결정한다. 이는 대학과정의 학업 성취도를 높이고 궁극적으로 학업과 직업 모델의 연계성을 높이는 대안으로 평가할 만하다. 실제로 우리의 교육과정 전반을 고려할 때, 고교 졸업 후 자신의 적성과 직업 전망에 부합하는 대학의 전공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학부제 모집은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전공선택권의 쏠림현상으로서 그 결과는 학부 내 혹은 대학 전체에서 특정 전공의 존망을 좌우한다. 예를 들어 자유전공학부는 "미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융합 학문을 가르칠"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도입 당시 서울대(정원 157명), 연세대(150명), 고려대(123명), 이화여대(40명), 중앙대(133명) 등 의욕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융합 학문을 가르친다’는 본래 취지는 전혀 구현하지 못한 채 자유전공학부는 인기학과로 가는 '디딤돌'로 전락했다. 법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위한 전 단계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한 가운데, 대부분의 학생은 경영학과와 컴퓨터공학과를 비롯한 소위 인기학과를 선택했다. 연세대의 경우 다수의 학부생이 경영학과를 지원하자 ‘경영예과’라는 비아냥이 돌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중앙대는 도입 이듬해에 바로 모집 중단에 들어갔고, 연세대는 5~6년 운영하다가 국제학부로 흡수했다.
다른 하나는 전공선택권에 부합하는 학부 내 전공들의 유기적인 협력이 예상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이다. 학부 입학생들은 학과 입학생들과 견주어 보면 소속감이 매우 약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해당 전공의 교수들과 사제지간을 맺기도 애매하고, 해당 전공의 선배들과 교유하기도 어정쩡하다. 한편 학부 내의 학과 교수들은 학부생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하여 다양한 신호를 보내면서 경쟁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학부 내 교수들의 실질적인 협조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국학·역사학부가 유지될 당시에 학부 내 전공들의 알력 관계는 건전한 교류를 해칠 정도로 심각했다. 예를 들어 2학년 진급 시 우수학생의 다수가 A학과에 몰렸다. 그러자 B학과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학부의 해체를 주장한 반면 C, D학과는 A학과 덕분에 그나마 학부에 적정 수준의 학생이 입학하고 충원에 문제가 없으니 A학과 쏠림을 눈감아주자는 태도를 보였다. 다른 학부에서도 대동소이한 문제들이 노출되면서 마침내 2008년 대학본부는 일제히 학부제를 폐지하였다.
나아가 무전공 입학은 대학에 대한 지극히 반교육적이고 비현실적인 인식에 기초한다. 교육부는 학생이 선호하거나 몰리는 전공과 학과를 존치하고 그런 분야에 대학의 재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그런 과격한 조치는 현실적으로 대학에서 실현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반도체학과의 진급생이 전년 대비 해마다 50% 넘게 증가한다고 가정하자. 교수 충원, 공간 확장, 실습시설 확충 등 교육여건이 충분히 충족될 수 있을까? 현재의 급여 수준으로 반도체 우수 인재를 대학교수직으로 유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다른 학과와 공존하는 대학의 속성상 공간의 확장도 결코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인재 양성은 기업의 상품 생산과 다름을 인식해야 한다. 기업은 시장 수요에 따라 설비 투자를 조정하고 상품 생산의 비중을 수시로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학은 어느 정도 특성화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교육과정과 인력 충원, 공간 배치 등 다양한 요소들의 지속성 때문에 상품을 찍어내듯이 인재를 배출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이른바 비인기 기초학문은 어찌해야 하는가? 필자의 대학에서는 2024학년도부터 철학과가 사라졌고, 2025학년도부터 자연과학대학이 해체된다. 혹자는 ‘아직도 지방대학에 물리학과와 화학과가 남아 있었어?’ 또는 ‘여전히 사립대학보다 변하는 속도가 늦네’라고 반문하거나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국립대라는 프리미엄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국립대마저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철학, 물리학, 화학 등 인문학과 기초과학을 포기할 때 과연 우리나라의 대학에 미래가 있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의 흐름에 비출 때 너무 한가한 한탄이라고 나무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시각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의 기초 없이 K-인문의 진흥이 가능하고, 정신문화의 수도를 표방하는 안동이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미래의 한류를 이끌 가능성이 열릴까? 나아가 기초과학의 토대 없이 첨단·융합 과학에서 꾸준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자율적 혁신’으로 포장된 교육부의 대학혁신을 거부한다. 그것은 허구다. 강요를 자율로 포장하고, 통제를 혁신으로 왜곡하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갉아먹는다. 적어도 지금까지 대학에서 융합 학문의 교육은 사기극과 다름없었다. 학생들이 그걸 몰랐을 리는 만무하다. 그저 인기학과로 몰려감으로써 사기극을 피해서 갔을 뿐이다.
최근에 답답한 마음에 임용 연차가 낮은 교수에게 “창의융합형 인재”가 어떤 학생을 지칭하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웃으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교수님의 눈높이를 낮추세요. 그냥 이 전공 조금하고 저 전공 조금하고 그렇게 여러 전공의 맛을 본 학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제서야 나는 얇고 넓은 지식의 유용성을 설파하는 주장이 대학에서도 통용되고, 급기야 마이크로 디그리(타 전공에서 3~4과목을 이수하고 받는 학위) 또는 나노 디그리(타 전공에서 2~3과목을 이수하고 받는 학위)의 도입이 사회적 수요를 반영하였음을 어렴풋이 인지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향후 우리 대학체제 전반에 가져올 영향을 생각하면 우울하다. 필자의 상식으로 대학은 근대 세계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기관이며, 현대 물질문명을 견인하는 원동력이다. 물론 미래 사회는 지금과 다른 메커니즘 혹은 프로세스로 작동할지 모르지만, 대학이 축적한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체계가 배제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래 사회를 대비한 인재 양성이 현재의 대학 교육을 딛고 새로운 패러다임 위에서 가능할지 몰라도, 돈으로 환심을 사서 새로운 제도를 강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런 맥락에서 필자는 대통령과 교육부 및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이율배반적이고 반지성주의적 행태들을 규탄한다. 과학기술 진흥을 약속하고 연구개발비를 대폭 삭감하여 과학기술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대통령, 특수목적고의 부활을 통해 고교학점제를 무력화하면서 학생의 전공선택권을 강화하겠다는 장관, 지방대학 시대를 선언하고 수도권 대학의 증원을 허용하여 지방민의 염원을 짓밟는 대통령, 선도주자(First Mover)가 되자고 부르짖지만 원천 기술 개발의 토대가 매우 약한 나라,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면서 과학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나라. 궁극적으로 기초가 허약하고 지속 가능성이 미약한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는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안상준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