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비금융 간 경계가 무너지는 '빅블러'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지만 한국의 금융 규제는 여전히 40여 년 전에 머물러있다. 금산분리 등 금융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해묵은 규제는 금융사의 신규 산업에 대한 진입 장벽을 높일 뿐 아니라 디지털 대전환 시기를 늦추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7일 금융당국 등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금산분리 완화와 관련한 세부안을 당초 지난해 8월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무기한 연기했다. 소상공인 등의 의견을 수렴한 뒤 추후 일정을 조율한다는 입장이지만 논의 자체가 후순위로 밀려난 데다가 4월 총선 일정 등을 고려하면 올 상반기 내에는 결론이 나기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IT 기술의 발달로 금융산업과 IT산업 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빅블러 현상은 지속되고 있는데 금산분리 규제 탓에 지주회사 체제 기업의 첨단전략산업 투자와 신사업 진출 기회가 가로막힌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금산분리는 1980년대 재벌들이 금융업에 대거 진출한 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외환위기와 2003년 카드 대란 등으로 재벌의 금융계열사 수가 줄고 비중이 대폭 하락하면서 금산분리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지주회사 금산분리 규제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도 맞지 않다. 미국의 경우 금융지주들은 중개업이나 데이터사업 등 금융과 관련된 회사들을 자회사로 둘 수 있고, 증권자회사를 통해 벤처기업 주식을 100% 취득할 수도 있다. 일본 역시 투자전문회사를 경유해 벤처기업 주식을 소유할 수 있다.
금산분리뿐 아니라 방카슈랑스·투자일임법 규제도 은행권 신사업을 막는 주요 규제로 꼽힌다.
은행에서 보험을 팔 수 있는 방카슈랑스는 △판매상품(종신보험, 자동차보험 등 불가) △판매비율(1개사 25% 이내) △판매인원(점포당 2인 이내) △취급업무(보험판매인의 대출업무 제한) △모집방법(전화·우편·통신 모집행위 금지) 제한 등 5대 핵심 규제를 받고 있다.
은행업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제외한 투자일임업도 허용되지 않는다. 은행 자산관리 분야 경쟁력이 다른 금융업계나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업계에서는 국내 은행이 경제활성화를 지원할 수 있도록 지배권이 없는 단순투자의 경우 자회사에서 제외하고 출자한도(15%)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상법은 50%, 공정거래법은 40%(상장회사는 20%)를 자회사 기준으로 정하는 만큼 은행의 기준을 상향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핀테크와 데이터 분석 등 금융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비금융업무를 자회사 대상에 추가하는 것도 기업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이수원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지주회사만 비은행 금융사 보유를 금지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과잉규제"라며 "은행 등 수신기능 금융업은 금산분리 규제를 유지하되, 대기업의 지배력 확장이나 부실 전이 가능성이 없는 집합투자업 등 여신기능 금융업에 대해서는 금산분리 규제를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