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5) 물과 불은 상극인가? … 수화불용(水火不容)

2023-12-1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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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에세이스트
[유재혁 에세이스트]

* 이 글에는 영화 '엘리멘탈'에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1068만 명이 관람한 올해 최고 인기작 '범죄도시3'의 기록도 가볍게 뛰어넘을 기세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영화가 흥행 순위 1, 2위를 다툴 이 두 작품으로 체면치레는 할 것 같다. 그렇다면 흥행 넘버3는 어느 영화일까? 다소 의외지만 지난 6월 개봉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이다. 
개봉 당시만 해도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던 '엘리멘탈'은 소리소문 없이 관객수 723만을 기록하며 2023년 최고 흥행 외화로 등극했다. 요즘 상한가를 치고 있는 '서울의 봄' 개봉 전까지만 해도 '범죄도시3'에 이어 당당히 전체 박스오피스 2위의 기록이다. '엘리멘탈'의 흥행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는 만물이 물, 불, 공기,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4원소설(四元素說)'을 모티브로 하고 이 네 가지 원소를 의인화하는 상상력에서 출발했다. '불'에 속하는 여주인공 앰버는 젊은 시절 고향 불의 도시를 떠나 4원소가 공존하는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주민 2세다. 성격은 당연히 불과 같다. 장성하여 아버지가 맨손으로 일군 가게를 이어받기 위한 준비를 하던 앰버는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시청 공무원이자 '물'에 속하는 청년 웨이드와 엮이게 된다. 앰버와 달리 웨이드는 유쾌하고 낙천적이며 물처럼 부드럽다. 웨이드가 불같은 성격의 앰버를 다독이고 설득하며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차츰 상대에게 마음을 연다.

유쾌하면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영화다. 한국계 이민 2세대 피터 손 감독이 연출했다. 이민 2세대 미국인이란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아주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모국어로 받아들인 세대를 일컫는다. 피터 손 감독도 한국말을 거의 못한다. 물과 불이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에 빠지는 감동적인 스토리에는 낯설고 물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미국땅으로 이민을 가서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했던 가족사가 녹아있다. 

'엘리멘탈'은 원소를 의인화하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이주자의 삶을 은유한다. 모든 원소가 함께 사는 엘리멘트 시티는 인종의 용광로 미국을, 앰버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 온 감독의 가족을, 시내 중심가 으리으리한 고층건물에 사는 웨이드 가족은 백인 주류집단을 상징한다. 앰버의 부모가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한 후 겪는 간난고초는 바로 피터 손 감독 부모의 이야기다. 개봉 전 방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부모님께 바친다고 말한 이유일 것이다. 

물과 불의 이야기를 다룬이 영화는 자연스레 물과 불에 관한 성어를 떠올리게 한다. 동한(東漢)의 정치사상가 왕부(王符)의 논저《잠부론潜夫論》에 이런 문장이 있다. “且夫邪之与正, 猶水与火, 不同源, 不得并盛(악과 선은 물과 불 같다.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성어 '수화불용水火不容'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세상은 반대에 끌린다"는 영화의 슬로건처럼 앰버와 웨이드의 스토리는 해피엔딩이지만 본시 물과 불은 상극이다. 서로 만나 좋을 게 없다. 물에 의해 불이 꺼지든 불에 의해 물이 증발되든 둘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수화불상용(水火不(相)容)'이라 했다. '수화불용(水火不容)'은 물과 불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대립적인 관계를 비유한다. 얼음과 숯의 관계도 그러하니 '빙탄불용(冰炭不容)'이라고도 한다. 유사한 표현으로 '수화무교(水火無交)', '수화불통(水火不通)' 따위도 있다.

뭐니뭐니해도 상극은 우리 정치권이다. 여야가 적당한 선에서 상호견제를 하지 않고 마냥 사이가 좋으면 그 또한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의 여야는 자신은 선이요 상대방은 악으로 여기고 죽기 살기로 진흙탕 싸움을 벌인다. 3류도 아니고 4류, 5류 정치라는 조롱에 별반 부끄러워 하지도 않으니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는가.

비단 정치권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물과 불 같은 관계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우리나라는 혈연, 학연, 지연이 삶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요즘은 직장에서 맺은 인연 '직연(職緣)'도 추가되었다.) 동창회, 향우회, 종친회, 친목회 등등 관련 모임도 많다. 그런데 어느 모임이나 서로 불편한 상대, 섞이기 싫은 얼굴이 꼭 있기 마련이다. 잘 나오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아, 나는 저 인간 때문에 모임에 안 나가" 라는 볼멘 반응을 접하기 일쑤다.

水火는 정녕 不相容인가? 영화 '엘리멘탈'은 그같은 상식과 고정관념에 도전장을 내민다. 물과 불 같은 관계도 공존할 수 있고 상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 비결이 '사랑'과 '희생'임을 태평양을 건너온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이 넌지시 일깨워 준다. 세상의 물과 불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민심이 흥행의 일등공신이 아닐까 싶다. 

행복을 탐구한 책 '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 보고서'(원제 The Good Life)는 하버드 의대 성인 발달 연구소가 1938년부터 85년째 진행하고 있는 행복 연구의 결과물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가 행복의 요체라는 게 보고서의 결론. '엘리멘탈'의 두 주인공 앰버와 웨이드처럼 '수화상애水火相愛'하고 '빙탄상생冰炭相生'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행복이라는 얘기다. 바야흐로 송년회 시즌이다. 평소 물과 불 같이 지내던 지인을 만나면 먼저 미소를 짓고 손을 내밀어 보는 건 어떨까.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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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끼리끼리 유유상종이 제일 편하고 좋은줄 알았는데 대립되는 두 원소의 조화라는 발상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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