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적자를 더 늘린다는 것은 지금 당장 먹고살기 위해 미래를 희생해야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경기 회복을 위해 전통적이면서 확실한 방법은 돈을 푸는 것인데 재정이 상당히 위험한 수준에 이른 지금 상황에서 정부가 쉬운 수단보다 어려운 길을 택했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 마지막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유일호 전 부총리는 13일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대내외적으로 경기 부양을 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지 않은 상황"이라며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앞서 유 전 부총리도 기재부 장관 시절 국가채무를 국내총생산(GDP)의 45% 이내로 유지하는 내용의 재정건전화법을 발의한 바 있다. 당시 둔화하는 경제성장률과 인구 감소세를 고려해 정부 지출을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고도 성장기 때와 같은 경제성장률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며 경제의 기초 체력이 약해진 요인으로 '규제' 이슈를 꼽았다. 유 전 부총리는 "지금도 계속 규제를 만들고 있다 보니 없애는 규제보다 새로 생기는 것이 더 많다"며 "이런 규제가 실질적으로 기업 활력 제고를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동개혁 지연에 따른 부작용도 지적했다. 그는 "독일도 고용의 유연성이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고 해서 하르츠 개혁을 추진한 것 아니냐"며 "노동개혁이 일부 대기업 노조에는 불리할 수 있지만 노동 시장 전체를 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하르츠 개혁은 2003년부터 시행된 노동시장 개선 방안으로 △노동 서비스·정책 능률 제고 △실업자 재유입 △탈규제로 고용 수요 제고 등이 골자다.
성장 잠재력을 해치는 고령화·저출산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이민 정책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다"며 "장학금 제도 등을 활용해 해외 인재를 데려와 취업도 시키고 우리 국적도 취득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전 부총리가 우리 경제를 위협할 뇌관으로 지목한 건 공공기관 부채다. 그는 "가계부채의 경우 규모가 커지긴 했지만 연체율 등을 볼 때 아직은 제어가 가능한 상황"이라며 "반면 최근 공공기관 부채는 늘어나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연쇄 도산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짚었다.
미·중 갈등의 여파로 대중 수출이 줄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수출 다변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중국을 배제하고 다른 수출길을 찾아야 한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며 "긴 앞날을 보고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 전 부총리는 당국자들이 현안에만 매몰돼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점을 경계했다. 그는 "정책 담당자가 되면 급한 마음에 당면 현안에 일희일비 하면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안에 집중하다 보면 적절하지 못한 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