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방산' 역사는 70년 한·미 동맹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5년 광복 직후 해외 원조와 수입에 의존했던 나라가 이제는 최첨단 전투기를 만들어 수출하는 수준으로 도약했다. '민주주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으로 불리며 2027년 세계 4대 방산 수출국을 목표로 힘차게 진군하고 있는 K-방산의 토대에는 한·미 간 오랜 혈맹의 역사가 있다.
대한민국은 광복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됐고 오늘날까지 늘 전쟁의 위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직후에는 미국 군사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이 발발하고 한국은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다. 미군 군사원조 규모는 커졌고 우리 군의 무장 수준도 향상됐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이 급변했다. '아시아 자국 방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하는 등 안보 불안이 커졌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 기치를 내걸고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세우며 무기 국산화에 박차를 가했다. 베트남전을 통해 입수한 미국의 낡은 병기를 분해해 모양을 베껴 역설계도를 작성하고 이를 토대로 소총과 탄약 등 기본 화기 제작을 시작했다.
국방부 조병창(현 SNT모티브)이 베트남전이 끝나 가던 1974년부터 미국 콜트사 M16A1 소총을 면허생산했다. 풍산은 1975년 M1소총 탄약을 필리핀에 수출하면서 'K-방산' 수출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한국과 미국 간 방산 협력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급격한 방위력 증강은 북한, 중국, 일본 등 동북아 지역 군사력 증강으로 이어지고 이는 역내 불안을 키우는 요소가 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의 '독자 핵무장'을 미국 행정부가 강하게 견제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결국 한국 방산은 미국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되 스스로 강해지는 방식을 택했다. 1990년대 노태우 정부는 러시아와 '불곰사업'을 추진해 러시아 군사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미국이 무기 판매에 소극적일 때는 프랑스와 독일 등과 접촉해 무기를 구입하며 관련 기술도 이전받았다.
이후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국방개혁 2020'은 오늘날 K-방산 주요 히트상품인 K2 흑표 전차, 방공로켓(천무‧천마), 다목적 헬기(KUH-1 수리온), K55 자주곡사포, 신형 구축함‧잠수함, 순항미사일(현무-3)을 개발·양산하는 토대가 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자주국방에 무게중심이 있었던 방산 패러다임을 수출로 변화시켰다. 이 대통령은 방위산업의 '신(新)성장동력화', 박 대통령도 '창조경제 핵심 동력화'를 외치며 동남아와 중동 등을 대상으로 방산 세일즈 외교에 적극 나섰다. 2013년을 기점으로 한국 방산 수출액은 30억 달러를 돌파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한·미 미사일 사거리 지침 완전 폐지'에 성공하고 매년 7~8% 수준으로 국방비 인상을 단행하며 방산에 투자했다. 방산업체가 ADD에 지불해야 했던 기술료를 전면 감면해 방산업체 가격경쟁력을 키우고 한국산 우선 구매와 지역 밀착 방산 혁신 클러스터 조성 등을 추진했다.
이러한 역대 정부의 노력은 윤석열 정부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한국산 무기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영향이 크다. 1975년 한국 최초 방산 수출은 미국 등에 판매한 소총 탄약(약 47만 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전투기와 탱크, 자주포 등 173억 달러(약 22조229억원)를 달성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영업사원 1호'를 자처하며 한국 방산 수출에 앞장선다는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