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와 이자부담 심화 등으로 집값이 혼조세를 보이는 가운데 서울 아파트 시장에서 양극화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재건축과 학군지 등 특징적인 장점이 있는 상급지의 ‘똘똘한 한 채’에만 투심이 쏠리고 있어 고가 아파트와 저가 아파트 간 가격 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7일 KB부동산의 10월 시계열 자료에 따르면 아파트 ㎡당 가격 5분위 배율은 3.3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수준과 동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5분위 배율은 5분위 아파트(상위 20%)와 1분위 아파트(하위 20%) 간 가격 격차를 나타내는 수치로 배율이 높을수록 격차가 심하다는 뜻이다. 서울 내 아파트 간 ㎡당 가격 차이가 ‘역대급’으로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가 주택이 전체 시장을 주도하는 흐름은 지역별 변동률에도 드러난다. 자치구 별로 보면 5월부터 10월까지 서울 외곽지인 금·관·구(금천‧관악‧구로구), 노‧도‧강(노원‧도봉‧강북구)의 경우 아파트값이 모두 하락했지만, 상급지로 꼽히는 강남구(2.32%), 서초구(0.61%), 송파구(4.41%), 강동구(1.59%), 양천구(1.72%) 등은 상승했다.
경기침체 및 고금리 여파로 시장 방향을 예상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상급지에 위치한 ‘똘똘한 한 채’에 대한 선호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똘똘한 한 채라는 단어는 앞서 문재인 정권 당시 유행했다. 당시 정부는 다주택자가 집값을 끌어올렸다고 판단하며 그들에 대한 세금, 대출, 청약 등 규제를 강화했는데 이에 투자자들은 여러 채를 사는 대신, 자금을 한군데 모아 상급지 고가 매물 한 채를 보유하는 방식으로 투자를 진행했다.
이런 똘똘한 한 채 보유 전략은 지난해부터 이어진 하락기의 가격 방어에도 유리했다. 상급지에 위치한 고가 아파트는 하락에서 상승으로의 전환이 서울 외곽지역보다 빨랐다. 한국부동산원 자료 등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는 지난해 1월 말부터 하락세가 본격화한 데 비해 강남구 아파트는 하락세가 6월 초 이후, 서초구는 그보다 더 늦은 8월 중순 이후 시작됐다. 아울러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 5월 셋째 주에 상승 반전을 보인 것과 달리, 서초구와 강남구는 이보다 앞선 지난 4월 넷째 주에 상승 전환했다.
강남구 개포동의 한 공인중개업자는 “공급이 한정된 상황에서 자산가들의 수요는 강남 등 상급지에 위치한 아파트로 몰릴 수밖에 없다”며 “결국 수요가 늘면 집값은 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구가 줄고, 주변 공급이 늘거나 이자 부담이 심해져서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등의 주장도 있지만, 대출에 비교적 영향을 덜 받는 자산가들의 수요가 몰리는 상급지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오르는 집은 명확한 이유 있다…재건축‧학군지 목동은 지난해보다 거래량 6배↑
똘똘한 한 채를 선호하는 흐름이 지속되는 가운데 특히 대치동, 여의도, 목동 등 주요 재건축 지역과 학군지 등의 거래량과 가격 변화가 두드러진다.
지난 6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10월 목동 신시가지 거래량은 43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69건과 비교할 때 6.3배 늘었다. 여의도 재건축 아파트 단지 16곳의 거래량은 같은 기간 109건으로 지난해 32건의 3.4배가 넘게 거래됐다.
대치동 아파트들은 올해 313건이 거래되며 지난해 같은 기간 85건과 비교하면 3.7배 증가했으며, 압구정동 아파트 거래량 또한 31건에서 106건으로 3.4배 늘었다. 서울 전체를 보면 올해는 2만9636건이 거래됐는데 이는 지난해 1만438건과 비교하면 2.8배 증가한 수준이다. 재건축 호재나 학군지로 유명한 지역 거래량이 더 많이 늘어난 셈이다.
이는 정부와 서울시 등이 정비사업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내놓은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서울시는 최고 층수를 35층에서 50층 내외로 높였으며, 한강변에서 가장 가까운 동도 기존의 15층 규제를 해제했다. 서울시의 신속통합기획(신통기획) 사업 절차를 하나둘씩 진행하는 단지도 나오는 중이다. 신통기획을 추진 중인 여의도 시범의 경우 지난달 초 정비계획 결정 및 정비구역 지정안을 확정했는데, 해당 아파트는 현재 3종 일반주거지역에서 준주거지역으로 용도지역의 종상향을 통해 사업성을 높였다.
대치동과 목동 등은 전통적인 학군지로 알려져 수요가 꾸준하다. 목동5단지 인근 한 공인중개업자는 “집값이 혼조세를 보일 때는 결국 사야 할 이유가 명확한 지역이 오르기 마련”이라며 “목동은 재건축 호재뿐 아니라 학군도 손에 꼽히는 곳”이라고 전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상승거래 및 신고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토부 실거래가에 따르면 강남구 압구정 현대7차 전용 196㎡는 지난달 17일 68억5000만원에 신고가로 거래됐는데 지난 고점보다 5억7000만원 오른 가격이다. 신현대11차 전용 183㎡도 지난달 5일 69억5000만원에 매매됐고 지난 7월 기록한 직전 고점인 64억원보다 5억5000만원가량 뛰었다.
목동신시가지 5단지 95㎡는 지난달 7일 23억원 신고가를 기록했으며 여의도 한양 전용 192㎡도 지난 9월 33억원에 거래되며 신고가를 찍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전용 79㎡의 경우 지난달 13일 19억7500만원에 거래됐는데 이는 지난 7월 있었던 직전 거래가격인 17억9000만원과 비교했을 때 1억8500만원 뛴 가격이다.
경매에서도 신고가가 나왔다. 법원 경매 전문기업 지지옥션에 따르면 압구정동 미성 1차 전용면적 105㎡는 지난달 26일 경매에서 34억7999만9000원에 낙찰됐다. 낙찰가율(감정가격 대비 낙찰가격 비율)은 105.45%로 해당 단지 같은 평형대에서 역대 최고 낙찰금액을 기록했다.
그러나 부동산R114 자료에 따르면 ‘영끌대출(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 매수가 많았던 중저가 아파트 밀집지역인 △영등포(하락거래 비중, 62.5%) △서대문(53.3%) △노원(51.4%) △도봉(47.1%) 등지에서는 이전 대비(1~9월 대비, 10월 거래) 가격을 낮춘 거래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금리 상승과 대출 축소, 경기 불확실성 등이 매수 관망세를 부추기는 가운데 원리금상환 부담이 커지자 가격을 조정해 처분에 나선 집주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도봉구 창동 '주공17단지' 전용 36㎡는 지난달 11일 3억5500만원에 거래됐는데 이는 2년 전 최고가 5억9900만원보다 2억4400만원 하락한 금액이다. 강북구 미아동 두산위브트레지움 전용 84㎡는 지난달 2일 2년 전 최고가 10억6000만원보다 3억6500만원 하락한 6억9500만원에 팔렸다.
전문가들은 경기둔화 우려와 이자 부담이 심화하는 가운데 강남권 등 서울 일부 지역만 살아나는 등 양극화 현상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여경희 부동산R114 수석연구원은 “금리가 인상되면 아파트값이 하락한다는 것에 대한 '학습효과'로 인해 매수자들 관망 심리가 커질 수 있다”며 “대출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는 지역 위주로 이 같은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 시장 회복 탄력성이 좋은 '똘똘한 지역'과의 온도 차가 심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