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신냉전의 바다에서 무기력하게 표류하는 UN

2023-11-07 09:05
  • 글자크기 설정
이병종 숙명여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학부  교수]

 
최근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 날로 격화되는 신냉전의 기류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아마 유엔(UN)일 것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의 포화가 난무하고 엄청난 인명 피해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 세계 평화와 안보를 위해 생긴 유엔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특히 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참혹한 전쟁의 와중에서 유엔의 무기력함은 극에 달한 듯하다. 유엔 주재 팔레스타인 대사는 유엔의 무책임함이 “혐오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유엔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전쟁과 평화 문제의 유일한 담당 기구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있다. 팔레스타인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미국 등 서방국은 지난달 말 이스라엘의 자위권과 하마스의 무장화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러시아, 중국의 거부권에 막혀 좌절되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휴전을 위한 결의안을 제안했지만 그보다는 단지 일시적 교전 중단만을 원하는 이스라엘을 동조하는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결국 안보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작년 초 시작되어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유엔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안보리에서 미국을 포함한 서방이 러시아의 침략을 응징하기 위한 제재 결의안을 꾸준히 제안하지만 역시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고 있다. 많은 희생자와 난민을 양산하며 10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 사태에서 아사드 정권을 응징하려는 서방의 노력 역시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로 표류 중이다. 냉전 시대의 동서간 이념 대립이 그대로 반복되는 신냉전의 단면을 보여 주지만 어디에서도 유엔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2차 대전이 끝나며 평화를 지키기 위해 탄생한 유엔이 이렇게 항상 무력했던 것만은 아니다. 먼저 한국전쟁 때에는 미국이 주도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한국은 북한의 무력 침공을 막아 내고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그 후 냉전이 격화될 때에는 미국, 소련 간의 대립으로 유엔의 역할이 제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러시아가 개방되고 서방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하며 유엔, 특히 안보리의 역할은 돋보이기 시작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응징하고 2011년 인권 탄압을 자행하던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몰아낸 것도 미국이 유엔의 승인을 얻었기에 수월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권위주의 회귀와 중국의 부상은 모든 상황을 과거의 극한 대립으로 원위치 시켰다. 양국은 미국 등 서방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유엔 안보리를 무력화했다. 미국도 유엔의 동의 없이 2차 이라크 전쟁을 강행하고 지나친 친(親) 이스라엘 정책으로 발목을 잡았다.
이런 대립의 배경에는 역시 유엔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전쟁의 승자들은 세계 안보 구조를 자신들 입맛에 맞게 설계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원래는 대만) 5개국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차지하며 절대적인 거부권을 획득했다. 이상주의를 반영하여 평등한 투표권을 보장하는 유엔 총회와 달리 현실 정치를 반영한 안보리의 이러한 불평등 구조는 아직까지 유지되어 평화를 위한 유엔의 노력을 종종 물거품으로 만든다.
이 퇴행적인 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상임 이사국 숫자를 10개국으로 늘려 5개국을 견제하려 시도했지만 별무 성과였다. 또 상임이사국 숫자를 늘리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무위에 그쳤다. 유엔 분담금을 미국 다음으로 많이 부담하는 일본과 독일을 비롯해 새롭게 부상하는 브릭스(BRICS) 회원국인 인도와 브라질을 상임위에 포함시키려 했으나 경쟁국들과 기존 상임이사국 반대에 막혀 좌절되었다.
유엔의 핵심 기구인 안보리뿐 아니라 여타 유엔 기구들도 갈수록 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유엔 예산의 70%를 사용하며 안보를 제외한 지구촌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는 원래 비정치적인 문제에 치중하며 개발, 빈곤, 건강, 기후 등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보여왔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노동기구(ILO), 식량농업기구(FAO),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유엔 시스템 내 19개 기관들과 협조하며 지구촌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역시 문제에 봉착한다. 원래 비정치적으로 여겨지던 개발, 기후, 노동, 기술, 통신 등 분야가 갈수록 정치적으로 변하며 각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특히 선진국과 후진국은 개발 협력, 기후 환경, 인권 등 문제에 있어 극단적인 대립각을 세운다. 이런 와중에 트럼프 행정부 기간 동안 미국은 유엔인권이사회(UNHCR), 유네스코를 탈퇴하고 분담금 납부를 거부하여 유엔의 위상을 더욱 추락시킨 바 있다.
유엔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인 한국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구해준 고마운 존재다. 유엔 시스템 중 하나인 세계은행(World Bank) 역시 한국 경제 개발을 위한 많은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얼마 전까지도 유엔 창립일인 10월 24일은 국경일이었다. 또 최근 들어 한국은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배출했다. 내년부터 2년간 한국은 유엔 안보리 10개 비상임 이사국 중 하나로도 활동하게 된다. 제한된 권한만 주어지는 자리지만 나름대로 노력하여 유엔의 추락을 조금이라도 막아주는 한국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병종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