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1) 말을 먹고 살찌다- 식언이비(食言而肥)

2023-11-0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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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혁
유재혁 에세이스트



<'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연재를 시작하며>
 
흔히 고사성어로 일컬어지는 성어(成语)에는 장구한 중국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다. 신화나 고사(故事), 혹은 고대 시문(詩文), 민간속담 등에서 비롯된 성어는 역대 선인들의 지혜가 빛을 발하고 언어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보석 같은 존재다. 성어는 바꿔 말하면 관용어, 숙어이고 영어로는 이디엄(idiom)에 해당된다.
 
시의적절한 성어 한 마디는 단박에 공감을 이끌어내고 좌중을 압도하는 결정적 한방이 되기도 한다. 고사성어의 본고장 중국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고사성어를 즐겨 인용하는 이유일 것이다. 허나 쓰려면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 일전에 야당의 모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비난하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란 성어를 인용했는데, 대통령을 호랑이가 아니라 여우에 비유하는 우를 범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다. 성어 오용의 위험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사성어 하면 곧 '4자성어'로 간주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중국어의 특성상 네 글자가 외우기 쉽고 발음할 때 리듬감이 좋아 4자로 된 성어가 많을 뿐이다. 고사성어는 몇 개나 될까? 우리나라 성어사전에 등재된 4자성어만 해도 3만개가 넘는다. 웬만큼 공부했다 한들 백사장 모래알갱이 한줌 지식에 불과하다. 부단히 공부할 수밖에 없다.
 
손가락 몇번 클릭하면 온갖 성어를 검색할 수 있는 세상이다. 단순하고 평면적인 소개를 지양하고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성어를 우리 주변의 일상과 엮어서 소개함으로써 읽는 재미를 더해보려고 한다. 본 칼럼이 흥미로운 중국 성어를 독자와 필자가 함께 공부하고 즐기는 교학상장(教學相長)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
 
1.말을 먹고 살찌다- 식언이비(食言而肥)
 
살다 보면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접한다. 그런 사람들을 일러 '식언을 했다'고 한다. 식언이 뭔가. 한자어는 한자를 봐야 뜻이 명료해진다. 식언(食言), 먹을 식에 말씀 언, 즉 말을 먹었다는 거다. 따라서 식언을 했다는 건 한번 입밖에 낸 말을 음식을 삼키듯 도로 입속으로 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말이란 게 입으로 삼켰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 말을 한 사람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식언이라는 말을 관행적으로 쓰지만 생각할수록 참으로 창의적인 표현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말을 거둔 것과 같고 이는 입을 통해 나온 말을 도로 입으로 삼켰음을 뜻하므로 식언이라고 한 발상이 그렇지 않은가.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과연 누굴까?
 
춘추시대, 노(魯)나라 대부(大夫) 맹무백(孟武伯)이 한 연회에서 군주 애공(哀公)이 총애하는 시종 곽중을 보고 "자네는 뭘 먹었기에 그렇게 살이 쪘는가?"하고 놀렸다. 평소 말은 많으나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맹무백에게 불만이 많던 애공이 그 말을 받아 "말을 많이 먹었으니 살이 찌지 않을 수 있겠는가(食言多也, 能無肥乎)!"라고 농을 했다. 이 말은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맹무백을 모든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풍자한 것으로, 맹무백은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식언의 저작권은 노애공에게 있는 셈이다. 이 고사에서 '식언이비(食言而肥)'라는 성어가 유래되었다. 출전은 《좌전·애공25(左傳·哀公二十五)》이다. 이때부터 식언이비는 말만 하고 책임을 지지 않거나 신용을 지키지 않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행위를 조롱할 때 쓰이기 시작했다. (* 大夫는 중국 고대의 관직명으로 경(卿)보다 아래이고 사(士)보다는 높다. 20등급 중 5등급에 속한다.)
 
식언이 잦으면 신뢰를 잃고 못 믿을 사람으로 전락한다. 필부의 식언은 그 폐해가 기껏해야 자신의 평판을 훼손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나랏일 하는 사람들의 식언은 공동체에 심각한 균열을 낳고 부정적 파급효과가 깊고도 넓다. 대통령의 식언은 특히 그렇다. 부동산 문제는 우리나라 경제의 대표적 뇌관으로 불릴 만큼 온국민의 관심사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시 "부동산만큼은 자신있다"고 기자회견에서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장담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과 달리 전 정권에서 수도권 아파트 가격은 곱절로 뛰었다. 대통령의 말을 믿고 아파트를 매각한 사람들은 땅을 치고 후회를 해야 했고 무섭게 치솟는 아파트 가격에 화들짝 놀라 영혼까지 끌어모아 돈을 빌려 소위 '영끌투자'에 나섰던 젊은 세대는 대출 원리금을 상환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다. 지난 19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금리를 연 3.5%로 유지했다. 지난 2월 이후 6연속 동결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금통위 후에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영끌족에게 1%대 금리를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부동산과 관련된 대통령의 거듭된 식언은 본인의 신뢰 상실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많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심적, 물적 고통을 안기고 있다.
 
전임 대통령의 불통에 지치고 쇼통에 식상한 국민들에게 윤석열 대통령은 소통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야심차게 시작했던 도어스테핑은 반년이 못 가 중단되었고 지금까지 기자회견은 취임 100일에 했던 기자회견이 전부다. 이를 두고 국민과 소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욕하면서 배운다더니 전 정부와 다를 바가 없다. 불통은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으로 이어졌다. 정책 발표가 그러했고 인사 또한 그러했다. 그 결과가 좀처럼 오르지 않는 지지율이고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의 참패다. 선거 패배 후 대통령이 다시 약속했다. 국민은 늘 옳다며 자신부터 많이 반성하고 소통하겠다고. 엊그제 국회에서 한 시정연설에서도 한껏 몸을 낮췄다. 국민들은 지켜볼 것이다. 대통령이 그 약속이 다시 식언이 되는지 아닌지를. 약속을 지키는 것이 대국민 신뢰 회복의 출발이고 지지율 상승의 동력이다.
 
식언이비에 대비되는 성어가 '일약천금(一諾千金)'이다. 한 번 한 약속은 천금과 같다는 의미다. '장부일언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이란 말도 우리에게 친숙하다. 일개 장부의 일언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대통령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말에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의 으뜸가는 책무다.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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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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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주 쓰는 말인데도 기원을 몰랐는데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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