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신생 기업 케이프리덤자산운용 사무실 중심에는 '새빨간 샌드백'이 놓여 있다. 알록달록한 인테리어와 형형색색 장난감, 레고 책상에 걸맞은 토끼 의자, 차곡차곡 쌓인 아동 도서 등 이곳은 사무실이 아닌 '신나는 놀이터'를 방불케 했다. 아빠‧엄마 손잡고 함께 회사로 '출근'한 아이들은 놀이방에 모여 놀거나 어깨 너머로 일을 배우고 투자 수업을 듣기도 한다.
회사에서 명예인턴즈로 불리는 아이들은 '아이폰과 갤럭시에 대응할 새로운 스마트폰 브랜드 전략 세우기'를 과제로 전달받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출근하는 기업을 설립한 박정임 케이프리덤자산운용 대표(46)가 밝힌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일과 육아를 기분 좋게 하는 기업, 유리천장이 없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고질병인 저출산 문제 해소에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
"美기업 수백억 배상···육아휴직 부당해고, 있을 수 없는 일"
박 대표는 뉴욕 UBS와 홍콩 BNP파리바 출신으로 글로벌 투자 분야 베테랑으로 꼽힌다. 20년 가까이 존 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와 함께 근무하는 등 연을 맺어 '존 리 키즈'로도 불린다. 외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많다 보니 우리나라에 만연한 육아휴직 부당대우 문화에 소위 '기겁'을 했단다. 그는 "미국에서 성차별한 기업이 수백억 원대 손해배상을 한 사례가 있다"며 "출산과 육아로 인한 부당대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직원과 아이가 함께 출근하는 수준까지 나아간다면 금상첨화다. 아빠‧엄마는 아이 걱정을 덜어 업무효율을 높이고 아이는 다른 아이와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아빠‧엄마 업무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다. 박 대표는 "이런 기업이 하나둘씩 늘어나다 보면 창업도 많아지고 대기업도 변하고 톱니바퀴처럼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한민국 기업문화 바꾸겠다"···10억원대 손배소 제기
자신을 육아휴직 부당해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박 대표. 그는 메리츠자산운용(현 KCGI자산운용)에서 수석매니저로 근무할 당시 인터뷰에서 "회사가 운용하는 자금을 10조원으로 늘리는 게 목표"라고 언급하는 등 애사심이 강했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신청하니 돌아온 건 근로계약기간 종료 통보였다고 박 대표는 전했다. 사측은 계약직에 대한 근로계약기간 만료 통지라는 주장이었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양측을 소환하는 등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박 대표는 전 회사를 상대로 10억원 상당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판례를 남겨 육아휴직 부당대우 문화를 근절하기 위해서다. 박 대표는 "이기든 지든 육아휴직으로 인한 부당대우와 관련한 판례를 하나 만들고자 한다"며 "비슷한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 많은 아빠‧엄마들이 이 판례를 가지고 자신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역설했다.
그의 법률 대리인이자 멘토는 아버지인 박일환 전 대법관(72·사법연수원 5기)이다. 박 전 대법관은 2007년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에게 무죄를 판결하며 압수수색 과정에서 증거가 위법하게 수집됐다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위법수집 증거배제 원칙'을 적용한 첫 판례를 남기며 법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 전 대법관은 미국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1933~2020년) 말을 인용하며 딸의 법률 대리인으로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박 전 대법관은 "그는 어떤 판결을 내릴 때 '이게 지금은 소수의 판결이지만 미래에는 다수의 판결이 됐으면 한다'고 했다"며 "법원에서 액수가 큰 배상이 한번 이뤄지면 기업들도 '이러면 안 되겠다'며 정신 차리게 되고 다수에게 이로운 판결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법원에서 전향적인 판결을 내려주면 부적절한 문화는 개선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