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 교과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 "학교에서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과목 융합형 문제를 내면 교육 당국과 사교육 산업이 한통속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학생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모는 이권 카르텔은 교육 질서를 왜곡하고, 학생들이 같은 출발선에서 공정한 기회를 제공받는 것을 저해한다." 지난 6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이 수능 관련하여 발언한 진술의 일부이다.
가히 파격적이고 예측 불허다. 그래서 수능 당사자들은 불안과 혼란을 호소한다. 시험을 코앞에 두고 수험생들은 레이스가 흐트러질까 불안해하고, 학부모들은 자녀의 입시 결과에 악영향이 미칠까 우려를 감추지 못한다. 일선 교사들의 난감한 표정과 학원 강사가 지을 의문의 미소마저 떠오른다. 모두가 느닷없는 평지풍파에 당황하는 모양새다.
수능은 대학 진학의 관문이다. 대학마다 수시 전형의 비중이 높아졌어도 학력 측정의 척도로서 수능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특히 상위권 학생의 실력을 변별하는 출제 난이도는 수능의 효능감을 과시하는 요소이면서 출제 오류의 원인이 되곤 한다.
2022학년도 수능이 끝난 후 평가원은 생명과학II 문항의 정답 오류 시비에 휘말렸다. 당시 평가원은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아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항변했다. 다시 말해서 ‘문항은 틀렸지만, 오류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일견 모순된 태도로 맞섰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출제자는 수험생들이 논리성·합리성을 갖춘 풀이 방법을 수립해 문제 해결을 시도할 경우, 정답을 고를 수 있도록 문제를 구성해야 한다. 문제의 오류로 인해 정답을 선택할 수 없게 됐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수능의 변별력과 킬러문항의 등장이다. 변별력은 공부 잘하는 수험생과 그렇지 못한 수험생의 실력차를 정확히 구별하는 척도를 말한다. 시험의 난이도와 변별력은 비례한다. 그런데 수능은 절대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이다. 100점 맞는 것도 중요하지만 몇 명이 100점을 맞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수가 100점을 맞는 복잡한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킬러문항이 등장한다. 즉 공부를 잘해도 틀려야 하는 문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평가원은 ‘변별’을 수능의 중요한 덕목으로 보고, 국민이 바라는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대체로 불수능 기조를 유지하는 추세이다.
변별력을 기초로 수능의 공정성은 절대적인 가치로 승화했다. 경제력의 격차, 기회의 차별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수시와는 달리 공정성 시비 없이 수험생을 줄 세우려면 시험이 가급적 어려워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원칙이 되고 국민은 큰 저항 없이 수용했다. 교육과정은 입시를 위하여 존재하고, 교육목표는 입시 성과로 귀결된다. 그 결과, 학력과 학벌이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학벌사회가 탄생했고, 공부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대통령의 돌발적인 수능 발언은 교육개혁의 시발점일까 아니면 교육부 장관의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나온 즉흥적인 제안일까? 교육과정과 수능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은 어느 정도일까? 수능의 초고난도 킬러문항을 질책하면서 대통령은 '학교에서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과목 융합형 문제'의 출제의 예로 국어의 비문학 복합지문을 콕 집어 지적했다. 그런데 현행 교육과정은 핵심 목표로서 '지식 정보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 융합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반 마련'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미 학교는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의 벽을 허물어 융합 교과 수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문과와 이과를 통합하는 취지도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심지어 대통령은 학과의 벽을 허무는 대학에게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교육정책에서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인식과 지시가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미래인재 양성을 표방하면서 이명박 정부 시절의 전수평가를 도입하고, 공교육의 정상화를 내세우면서 특목고 폐지를 번복하는 정책의 상충이 다반사다. 그날 대통령의 발언은 준비되고 다듬어진 정책의 지시라기보다 즉흥적인 대응으로 보인다. 문제는 만기친람 스타일의 대통령이 즉흥적인 사안을 불쑥 지적하고 지시하는 행태가 교육 분야에서 자주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경제를 위한 교육의 쓸모를 강조하는 대통령의 도구적 교육관이 빚는 반복된 현상으로 이미 지난해 반도체학과 설립 지시에서도 드러났다.
대학 입시는 교육과정 평가의 한 단계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사안이다.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대학입시 개편이 얼마나 어려운지 윤석열 대통령은 과소평가한 게 틀림없다. 수능은 일종의 늪이다. 준비 없이 내딛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무한경쟁을 조장하는 줄 세우기식 상대평가를 없애고 수능을 포함하여 절대평가 체제로 전환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입시개혁이 뜨자마자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어 김상곤 교육부 장관 겸 초대 사회부총리는 교육개혁의 첫발도 떼지 못하고 맥없이 물러났다.
이번 논란으로 대통령과 여당에게 밀려올 파고가 서핑을 즐길 정도의 수준일지 아니면 쓰나미가 되어 모든 걸 휩쓸어 갈지 자못 궁금하다. 이 가이드라인이 대략 50만 수험생의 인생을 좌우하는 변수로 작용하고, 그로 인하여 수험생의 반발이 터져 나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대통령이 직접 발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능의 난이도와 사교육비 감경 문제를 대통령이 직접 챙길 사안인지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마치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에 대하여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설전을 벌임으로써 외교문제가 더욱 복잡미묘해지는 것처럼, 교육 내적인 문제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전문가와 교육부 관료에게 맡기는 게 타당해 보인다. 그보다 큰 틀에서 거시적인 관점으로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해결할 문제는 따로 있다.
수능으로 가는 ‘교육지옥’에서 학생과 학교를 구해내는 임무다. 대한민국 초·중등 학생은 시험의 굴레에서 시들기 일쑤이고, 획일적인 교육과정 때문에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몸에 익히지 못한다. 5지선다형 찍기 교육으로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증강현실 등 최첨단기술을 개발하고 상품으로 만들 인재의 육성은 요원하다.
교육방식의 다양화와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교육목표의 설정이 시급하다. 식민지 시대부터 지속되는 공급자 위주에서 교육 수요자 위주로 교육의 관점이 전환되어야 한다. 수능은 공정한 잣대를 핑계 삼아 교육 수요자를 객체로 전락시키는 도구로 작동한다. 교육 수요자의 사고 능력이나 전인적 인격과는 전혀 무관한, 타인의 성적에 따라 나의 지적 능력과 심지어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비인간적인 방식이라는 말이다.
2019년 11월 한국교육개발원은 대학 입시 제도의 개편을 모색하면서 주요 국가들의 최근 입시제도를 소개한 바 있다. 전반적인 흐름은 획일적인 평가를 벗어나 다면적인 평가를 강화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독일과 프랑스처럼 교육의 공공성이 확립된 국가는 누구나 원하면 대학에서 공부할 권리를 보장한다. 학문의 성격상 입학 인원 제한이 불가피한 일부 학과(의학과, 심리학과, 법학과 등)의 경우에 제한하여 경쟁 입시가 치러진다. 미국, 일본, 중국도 예외 없이 다원화하고 차원이 다른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학생의 수학능력을 다면 평가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한날한시에 5지선다형 객관식 시험으로 학생의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무모한 방식을 재고하고, 국가적 과제로서 수시 전형의 공정성 담보 및 한국형 다면평가의 방식 도입을 위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지식영역을 넘보는 시대가 도래하여 인간에게 남겨진 분야가 무엇인지 우리는 냉정하게 분별할 시점에 와 있다. 모든 전문가는 창의력과 철학의 영역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 맥락에서 올해 치른 프랑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의 문항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1. 행복은 이성(理性)이 관계된 영역인가?
2. 평화를 원한다는 것은 정의를 원하는 것이기도 한가?
3. 제시된 레비 스트로스(프랑스의 인류학자, 구조주의자)의 <야성의 사고> 중 한 대목을 읽고 분석하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에게 묻는 문제로서 참으로 품격이 있다. 위 문항 중 하나를 골라 4시간 고민하고 답안을 작성하는 수험생을 생각해보라.
대통령의 돌출 발언이 논란이 된 지 5일 만에 이주호 장관은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공정 수능이 되도록 공교육 과정 내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은 출제를 배제하고 적정 난이도가 확보되도록 출제기법을 고도화해 출제진이 충실한 노력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 점검을 하는 등 교육부 수장으로 모든 가능한 지원을 하겠다.” 대통령의 의지가 실제로 구현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봐야 5지선다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미네르바대학, 태재대학 등 캠퍼스 없이 세계 각지를 옮겨다니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신개념의 대학을 논의하는 세상이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인간은 우주로 여행하는 시대를 꿈꾸고 있다. 수능의 공정성과 문항의 난이도를 놓고 여론이 들썩일 때가 아니다. 우연히도 대통령의 킬러문항 발언 덕에 본격적으로 수능 개편을 논의할 시점이 찾아왔다. 역사는 예기치 않게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필진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연세대 사학과 졸업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2021년 5월부터 한국 대학체제의 개혁 방안을 모색하는 ‘삼각지연구팀’에 참여, <대학법체제정비>(2021)와 <고등교육 패러다임 대전환을 위한 대학정책>(근간) 공저 △교수신문 기획연재 '대학법과 대학의 미래'의 책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