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민사·행정·특허 미확정 판결문까지 판결문 공개 범위가 확대됐지만 ‘깜깜이 판결문’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열람 제한 판결문'이라는 이유로 판결문을 볼 수 없는 사례가 여전한 것이다. 특히 법원에서 영업비밀 보호 등을 이유로 기업의 판결문 비공개 신청을 받아 주는 일이 늘면서 판결문 공개 원칙에 역행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잇따르고 있다.
28일 아주경제 취재에 따르면 일부 기업들이 영업비밀 보호 등을 이유로 대기업 총수의 비위 행위나 기업의 위법 행위가 드러나는 사건의 판결문에 대해 열람 제한을 신청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기업들, 총수 비위·불법 행위 판결에 열람 제한 신청···"국민 알 권리 침해"
2019년 배임·횡령 혐의로 기소된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가운데 판결문 공개를 제한해 논란을 빚었다. 당시 사회적 관심과 영향이 큰 재판인데도 법원이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조 회장 측의 판결문 열람 제한 요청을 받아들여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는 비판이 일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지난 5월 미인증 배출가스 관련 부품이 탑재된 차량을 불법 수입한 혐의로 기소된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법인이 1심에서 벌금 20억원을 선고받고 법원에 판결문 열람 제한 신청을 했다. 벤츠코리아 측은 "영업비밀과 개인정보 보호 목적으로 열람 제한을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판결문 열람 제한 신청을 놓고 재판까지 진행된 사례도 있었다. 1조원대 과징금을 둘러싼 '세기의 재판'으로 관심을 모았던 퀄컴과 공정거래위원회 사건에서 퀄컴은 영업비밀 보호를 이유로 판결문 열람 제한 신청을 했다.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퀄컴은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대법원이 "판결문에 영업비밀 해당 가능성이 큰 정보가 담기지 않았다"고 결정하면서 퀄컴·공정위 판결문은 6개월 만에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해외는 실명까지 공개하는데···법조계 "영업비밀 부분만 가리고 판결문은 '공개'가 원칙"
미국은 원칙적으로 연방법원에서 선고한 모든 판결문을 선고 후 24시간 이내 법원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대리인이 제출한 준비서면과 모든 법정 기록은 물론이고 소송 당사자 실명도 공개한다. 캐나다, 영국, 네덜란드도 판결문을 전면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중국은 혼인사건이나 형사사건 피해자, 미성년자를 제외하고 실명으로 판결문을 공개한다.
법조계는 여전히 우리나라 판결문 검색·열람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지적한다. 영업비밀 보호와 관련해 기준이 모호해 재판부마다 판단 기준이 다를 수 있어 판결문 열람 제한 신청 조건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대기업 총수나 기업 관련 판결문을 영업비밀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하고 심지어 그 구체적인 이유조차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취지다.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판결문은 '공공재'인데 엘박스, 케이스노트 등 법률 데이터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설 기업들이 변호사 등에게 판결문을 제공하고 그것으로 돈을 벌고 있다"며 "이는 결국 판결문 공개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기업이 영업비밀을 이유로 판결문 비공개 신청을 하면 재판부로서는 이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 기업 측이 비공개 신청에 대한 소송을 또 제기할 수 있으니 웬만하면 받아주는 분위기인 것 같다"며 "해외는 중대한 영업비밀 관련 부분이 판결문에 나오면 그 부분만 전체적으로 가리고 판결문은 원칙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판결문 공개가 원칙인 만큼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다면 '판결문 전체 비공개'가 아니라 해당 부분만 가리고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