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인 1992년 9월 21일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내가 적절한 시기에 일본의 구주(규슈) 지역 같은 곳을 방문하여 일본 총리와 만났으면 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계기에 와타나베 미치오 일본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렇게 첫 운을 떼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도쿄는 아무래도 번잡하고 하니 지방에서 편하게 총리와 만나 회담을 하고 당일 귀국하는 간편한 방식의 방문을 했으면 좋겠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접견에 통역으로 참석했던 필자는 당시 외무부 내 일본 담당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음에도 대통령 방일 문제는 금시초문이어서 영문도 잘 모른 채 이를 일본어로 전달하는 데 급급했다. 대화 상대인 와타나베 대신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듣고 배석한 일본 수행원에게 대통령 발언에 대한 취지를 재확인하는 등 당황한 기색을 보이면서 검토 후 일본 측 입장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한·일 정상 간 실무 방문, 즉 ‘셔틀 외교’가 우리 대통령에 의해 처음 제기된 순간이었다. 이후 일본 측이 방문지로 고도(古都) 교토를 제의하여 약 한 달 반 후인 1992년 11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의 당일치기 교토 방문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배석했던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접견이 끝난 후 필자에게 “이 사안은 보안을 요하는 중요한 일인 만큼 외교 전문 보고서에도 자세히 언급하지 말고, 접견 기록을 타이핑도 시키지 말고 손 글씨로 직접 정리해서 바로 귀국하여 국장에게 보여주고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간 한·일 간에는 2박 3일 정도 국빈 또는 공식 방문이 통례였으나 절차와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정상 간 우의를 증진하고 양국 관계 발전 방안이나 국제 정세 등 공동 관심사에 대해 폭넓게 협의한다는 취지에서 새로운 형태의 셔틀 외교가 시작되었다. 이는 그 후 1993년 11월 6~ 7일 호소카와 총리의 경주 방문, 1996년 6월 22~23일 하시모토 총리의 제주도 방문, 1997년 1월 25~26일 김영삼 대통령의 벳푸 방문과 2004년 12월 17~18일 노무현 대통령의 이부스키 방문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2005년 6월 20~21일 고이즈미 총리의 서울 방문 이후 독도 및 해양 문제 등으로 양국 간 갈등이 심화되어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을 계기로 셔틀 외교를 복원하기로 합의하고, 2009년 6월 28일 이명박 대통령의 도쿄 방문과 2009년 10월 9일 하토야마 총리와 2011년 10월 18~19일 노다 총리의 서울 방문 등이 이루어졌다. 그 후 2011년 12월 17~18일 이명박 대통령이 교토를 방문하였으나 위안부 문제에 관한 갈등이 표면화하고 한·일 관계 전반이 악화됨으로써 이후 12년 동안 양국 정상 간 회담을 위한 상호 방문이 전면 중단되는 비정상적 상황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