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우외환 한국경제’라는 표제의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세계 경제 환경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중국의 성장률이 떨어지고 미·중 간 패권경쟁으로 첨단분야의 디커플링이 심화되고 있음을 우려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중 무역수지는 2013년 628억 달러 흑자였으나 2022년에는 12억 달러로 축소되었고 금년(1-3월)에는 벌써 170억 달러 가까이 적자로 돌아섰다. IMF 경제위기 이후 지속적인 흑자기조를 유지해 온 무역수지는 2022년에 479억 달러 적자를 기록하였고 금년(1-3월)에도 이미 224억 달러의 적자이다. 세계적인 금리인상과 이에 따른 경기침체가 중요한 요인이지만 경기가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세계 경제 환경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유럽은 이러한 미국의 조치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대항조치를 내놓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최근 ‘유럽반도체법’, ‘폐배터리규정’, ‘기후중립산업법’, ‘핵심원자재법’ 등을 연달아 제안하였고 미국과 중국의 대외정책에 대항하고 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역외보조금규정’, ‘공급망실사지침’, ‘통상위협대응규정’ 등의 법안을 제안하고 채택하였다. EU는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첨단산업의 역외 의존도를 낮추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러한 조치들은 우리나라 수출기업이나 현지 진출한 기업에게 추가적으로 비용을 부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처럼 EU 또한 역내 공급망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첨단산업의 대외의존도를 낮추며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정책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전에 쓴 칼럼에서 이웃 일본의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법은 (1)특허출원의 비공개 제도 도입 (2)공급망 강화 (3)첨단기술의 민관협력 (4)중요 국가인프라의 안전성 확보를 골자로 한다. 반도체 등 ‘특정중요물자’로 지정된 품목은 국내에서의 개발과 생산을 재정적으로 지원한다. 정부는 특정중요물자의 개발 및 생산계획을 심사하여 지원대상기업을 선정한다. 정부가 민간과 협력하여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지원하는 기금을 설치한다. 기술개발에도 정부 보조금이 투입되며 나아가 정부가 보유한 기술정보까지 민간기업에게 제공한다. 통신, 전력, 항공, 철도 등 국가 중요시설에 소요되는 설비나 기기를 도입할 시 국가의 심사를 받도록 한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를 통해 미·일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도 자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공급망의 안정성을 보강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에 동참하는 등 미국의 대중 제재에도 협조적으로 나서고 있다.
중국은 자립자강을 외치고 있으나 불확실성이 높다. 미국의 반도체 제조장비에 대한 대중 수출 규제로 인하여 중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수출통제가 도입된 2022년 10월 이전(1-9월)과 그 이후(10-‘23.2월)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 추이를 보면 대부분 처리공정에서 수입이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열처리, 증착(PVD), 건식식각, 기타 식각 등의 공정에 필요한 장비의 수입은 20∼40%나 감소하였다. 외자기업이 많이 소재한 지역보다 중국기업이 많은 지역에서 수입감소가 두드러지고 있어서 중국기업이 타격을 더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진핑 3기의 출범과 더불어 중국은 최고 국가기관에서 과학기술분야를 직접 총괄하도록 조직개편을 하는 등 공급망 안정과 자립화를 중시하고 있으나 기술혁신의 한계를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여기에 인구고령화, 소득격차 확대, 부동산 버블, 기업부채 등 중장기적 리스크도 산적해 있다. 한국으로서는 중국경제의 중장기 리스크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한 과제이다.
미·중경쟁과 러-우 전쟁의 여파로 아세안과 인도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어서 이들 지역·국가와의 관계 설정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주요국은 자국의 글로벌 공급망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은 그동안 활발하게 FTA를 추진해 왔으며 그 결과 글로벌 공급망 참여가 확대되었다. 향후에도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CPTPP(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여, 무역의 디지털화 등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니켈, 보크사이트, 팜오일 등 자국의 핵심 자원 가공산업을 육성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정책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주요국들은 아세안을 두고 경쟁이 치열하다. 중국과 호주는 2021년, 미국은 2022년, 일본은 2023년에 아세안과의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CSP)로 격상하였다. 무역 및 공급망 안정화 협력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인도의 전략적 중요성도 높아졌다. 최근 인도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였고 2024년에도 6%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과의 경쟁을 고려하여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들의 대인도 협력은 향후 더욱 구체화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인도태평양전략을 발표한 바 있다. 인도가 제조업 육성을 위한 산업정책, 인프라 개발정책, 경제사회의 개혁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고려하여 협력 기회를 모색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개개인의 삶이 ‘각자도생’의 길로 흘러가고 있듯이 국가들의 정책도 ‘각자도생’의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누군가 나서서 전체를 규율하고 방향을 잡아주고 협력을 유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글로벌 사회 전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각자 자기의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일이 많아질 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위기는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찾아온다.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금융위기 또는 안보위기가 터질지 모른다. 그리고 위기가 터지면 그 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빠르게 주변으로 확산될 것이다.
예전에는 다자체제에서 힘이 세고 선의를 가진 누군가가 질서를 잡아주면 우리는 그 질서 속에서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분투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모든 나라가 각각의 독자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시대가 되었다. 양자관계에 힘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의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무엇이 비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인지는 조금만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가계, 기업, 정부 모두 ‘자신의 분수에 맞게’ 소비, 투자, 그리고 재정 활동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각자도생의 시대일수록, 위기와 불확실성이 더 가까이 있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위치에 맞게, 그 분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성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